(6:1-7)

교회와 사도들에 대한 핍박은 더해졌지만, 예수의 도를 믿는 제자의 수는 늘어났다. 사도행전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면, 이러한 핍박은 복음 확장의 계기가 되는데 그 시작이 집사의 임명이다. 언뜻 집사는 교회의 구제가 불공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정의 보강처럼 보이지만, 정작 집사들의 행적을 보면 사도와 다를 바 없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한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와 빌립 집사의 일이 바울 사도의 회개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계기가 된다.

 

교회에는 출신이 다른 성도들이 있었다. 이건 사람이 많아지면 나타나는 필연적 현상이다. 성도들의 구제를 주관하던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기에 바빴기 때문에 교회의 구제가 출신 별로 공정하지 않다는 불만이 쌓였고, 이 문제를 바로잡고자 집사를 선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은 이걸 행정과 사역의 분리처럼 보고 있는 것 같다. 오늘날 교회의 행정 구조도 그렇다. 명목상이긴 하지만 교역자 그룹과 당회를 구성하는 장로들의 역할을 나눈 게 그렇다.

 

하지만 구제의 공평을 위한 것처럼 보이는 이 말씀은 식량의 공정한 배분과 같은 육신의 필요에 대한 구제가 핵심이 아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일을 행정과 사역으로 나눌 때 효율적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문제를 바로 보려면 교회의 필요, 교회가 행하는 구제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하고, 이 관점에 해답을 해결하는 건 바로 교회의 정체성이다. 교회의 정체성은 교회가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에서 알 수 있다. 구하고 있다는 건 곧 필요고, 구제는 그 필요의 공정한 분배다. 구제를 육신의 먹거리, 입을 거리로 보면 본질을 볼 수 없다.

 

교회의 성도들이 가진 불만은 먹을 것, 입을 것에 관한 공평한 구제가 아니다.

 

당장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집사들은 쌀 나누어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스데반은 순교했고, 빌립 집사는 다니며 이방인이라도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교회가 필요했던 구제는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음지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성도들의 마음이다. 그래서 구제를 위해 집사를 선출하겠다는 사도들의 말에 온 교회가 기뻐했다고 한 것이다. 이를 기뻐한 교회는 사도들이 옥에 갇혔을 때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던 그 교회다.

 

온전한 교회가 바라는 공평한 구제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복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것

 

즉 사람들이 원한 구제는 영적 구제고, 이것이 공평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랐다는 건 출신에 무관하게 복음이 전해지기를 구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간구대로 스데반을 통해 바울 사도가 회개하고, 그 바울 사도가 말 그대로 차별 없이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 이른 흐름을 증명하는 한 사례가 바로 사마리아와 이디오피아 내시장에게 복음을 전한 빌립 집사의 일이다. 그리고 이어서 베드로가 군대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을 찾게 되는 과정을 거쳐 복음은 전 세계로 전파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육신의 안목으로 읽지 않고 사도행전을 제대로 읽었다면,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성도들이 자기 소유를 팔아 교회의 필요를 위해 사도들 앞에 두었다는 말씀 속 필요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일곱 집사를 선출하는 과정을 육신의 빈부 격차에서 발생하는 구제의 필요로 읽고, 설교하고, 믿는다는 건 성경을 육신의 안목으로 읽고 믿는다는 증거다. 교회의 정체성을 까맣게 모르는 것이며, 이걸 모른다는 건 성령이 없다는 뜻이다. 그건 곧 구원이나 거듭남이 없다는 의미이므로 깊이 돌아봐야 한다.

 

물론 우리의 삶에 육신의 필요는 절대적이다. 성경의 모든 걸 영적인 의미로만 보는 걸 경계하는 이유기도 하다. 그러나 알아야 하는 건 육신은 그 속에 있는 걸 표현하는 형식이란 것이다. 그건 역설적으로 속에 있는 것, 심령과 영혼이 온전하면 그 온전함대로 육신의 일도 형통하게 된다는 뜻이 된다. 당연히 이 형통함의 기준도 세상적 기준이 아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

 

사도행전을 처음 시작할 때 사도행전은 성령이 하시는 일을 기록한 성경이라고 설명했다. 너무 당연한 이 기준으로 일곱 집사의 선출 사유를 본다면 당연히 이 구제는 성령의 역사가 공평하기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성도들의 간절함이다. 그리고 이는 사도행전의 전개가 증명한다. 집사의 일을 전후로 성령의 역사가 유대와 예루살렘에만 머물지 않고 널리 퍼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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