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5:12-16)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친 일로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에서 심문을 받았고, 교회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했으며, 성도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아서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을 이루는 데 필요를 충당했다. 이 사이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나님의 필요를 자기 기준으로 계산하다 심판을 받아 죽는 일도 있었다. 교회와 사도들과 성도들의 삶은 성령 충만한 삶이 무엇인지를 계속 보여 주었다.
특히 사도들의 능력은 병 고치는 것으로 많이 나타났다. 하지만 능력에 관해 더 본질적인 사람의 견해는 교회와 성도들을 칭찬했다는 것이다. 능력으로 병이 낫는 것도 분명 놀라운 일이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된 건 성도들의 삶이었다. 사람은 칭찬할 만한 일을 동경하고 자기도 동참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회의 능력이 되어야 한다. 성도들의 삶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사람이 스스로 믿음을 가지기를 소망하도록 하는 능력이 복음을 온전하게 전한다. 성경이 말하는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 속의 '강권'은 사람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는 것 이상의 강권은 없다.
교회의 능력은 사람이 신앙을 가지고 싶도록 만드는 것
사도들의 능력으로 여러 가지 질병들이 나았다고 했다. 그중에서 특별히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을 받는 사람들이 나았다는 말씀을 구분해서 기록하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귀신 들린 걸 흔히 정신병 정도로 이해하기 쉬운데, 성경은 그런 의미로 귀신 들린 자의 회복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귀신이 들렸다는 건 자기 머리, 자기 생각, 자기 의를 정체가 불명한 존재에게 빼앗긴 상태다. 사람이 자기 본질과 존재 목적을 망각한 상태를 총망라한 표현이다.
귀신 들렸다는 건 자기 정신과 존재 목적을 상실했다는 것
사람들은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현상과 존재를 귀신이라고 한다. 귀신은 정체불명의 존재다. 성경이 공중 권세 잡은 자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공중은 좌표나 공간의 거처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존재들을 총칭하는 말이 귀신인 셈이다. 이런 귀신에게 머리를 빼앗겼다는 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귀신 들린 상태를 고쳤다는 건 자기 존재 정체성을 회복했다는 말이며, 이는 교회가 간구한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귀신 들렸다는 건 자기 존재 목적을 벗어난 가치관과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상태다. 기계를 고칠 때 용도와 목적에 맞지 않는 부품이 있으면 설사 그 부품에 정확한 규격이나 명칭이 있고 심지어 아주 비싼 것이어도 정체불명의 부품이 있어 고장 났다고 한다. 귀신 들린 게 무엇인지 설명하는 상황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이 아니라면 어떤 걸 추구해도 모두 귀신 들린 삶이다.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사랑은 의미 있는 관계에서 비롯되는 헌신과 애정인 만큼 하나님께서 창조한 목적대로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의미 있는 사람이므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 없이 목숨을 내어 주어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게 하나님의 법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 아닌 걸 추구하는 모든 삶은 귀신 들린 괴로운 삶
결론적으로 귀신은 더럽고 괴로움을 준다. 목적에 맞지 않는 부품은 거저 더러운 쓰레기와 같은 폐기물일 뿐이듯, 사람이 자기 존재 목적을 벗어나서 목적 기준으로 정체가 불명한 것을 추구하며 살면 재벌 회장으로 살거나, 국가 원수 혹은 거룩한 신부나 목사로 살아도 목적을 기준으로 소용없는 삶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삶을 '고(苦)'라고 뇌까린다. 그러니까 더럽고 괴롭게 하는 귀신 들린 삶에서 고침을 받는다는 건 인생의 목적을 회복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존재의 목적을 바꾸는 건 곧 거듭남이다. 존재에게 있어 목적이 바뀌는 건 정체성이 바뀌는 것이다.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이 되는 것과 같다. 자기 존재 목적이 아닌 정체불명의 귀신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던 인생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되는 건 거듭남이다. 생명이 바뀌는 것이다. 병 낫는 것에 비하면 생명이 바뀌는 건 비교도 안 되는 더 큰 기적이다. 성경의 진정한 기적은 사람의 거듭남인 이유다.
귀신 들린 데서 고침을 받는다는 건 곧 <거듭남>
또한 인생의 목적이 회복된 삶은 괴롭지 않다. 삶의 불편이 해소된다는 뜻이 아니다. 예를 들어 감기가 들면 거듭난 사람이라도 괴로운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삶을 바라보고 용납하는 마음과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평안이다.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치유는 이것이다. 이렇게 귀한 걸 두고 고쳐도 어차피 죽는 육신에 임하는 기적에 매몰될 게 아니다. 무엇을 귀하게 볼 것인지를 아는 안목이 바로 밝음이다. 빛이 있으라고 하신 그 빛이 바로 이것이다.
성령의 충만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이치를 넘는 기적이 아니라 거듭남이듯이, 성령 충만을 받은 사도들의 기적 역시 과학과 사람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을 행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것임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 모인 곳이 진정한 교회기에 교회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것을 위해 헌금이 모이는 곳이다. 이렇게 깔끔하게 연결된 성경의 흐름을 볼 수 있는 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빛이다. 그러므로 이런 기적을 바라는 게 진정한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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