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9 – 핍박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6. 9. 06:35 Writer : 김홍덕

(5:17-42)

가말리엘(: 하나님의 상급)의 변론을 옳게 여기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대제사장 무리는 사도들을 불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였다. 하나님의 일인지는 두고 보면 알 것이라는 가말리엘의 말을 진정으로 옳게 여겼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인데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보였다. 예수님께서 회칠한 무덤이라 하신 그대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교회는 지속적인 핍박을 받았다. 하지만 사도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한 합당한 상황이라 여기고 채찍질을 당했음에도 기뻐하면서 공회, 곧 대제사장 무리들을 떠났다. 그러고는 언제 채찍질 당했냐는 듯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걸 가르치고 전하는 일을 쉬지 않았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입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행 5ㅣ41-42)

 

초대교회라고 하면 우리는 '성령 충만', '완전한 공동체'라는 것과 함께 핍박을 떠올릴 정도로 많은 핍박이 있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가 받은 핍박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전했고, 사람들이 이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교회를 핍박하는 부류는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게 정당했고, 그는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라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을 선지자의 한 명으로 본다는 이슬람도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는 이유, 더 정확히는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자신이 핍박받는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공부하는데 방해가 되니 교회에 다니는 걸 반대하는 부모님의 관점을 핍박으로 보기도 하고, 집안일 등한시 한다며 교회 가는 걸 반대하는 가족의 잔소리를 또한 핍박으로 생각한다. 사랑의 교회(전광훈 목사)같이 아주 심각한 착각도 있는데 이건 언제 한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쟁점은 이것이다. '나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가?' 그리고 내가 핍박한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그들의 의견은 십자가를 진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가다. 이렇게 말하면 아주 작은 종교적 논쟁 하나를 가지고 모든 신앙의 갈등과 신앙 없는 이들이 교회와 기독교인을 대하는 태도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삼는 게 합당한지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건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는 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자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이건 이단을 판단하는 원천적 기준일 뿐 아니라, 당연히 핍박을 정의하는 기준이다.

 

따라서 핍박을 논하려면, 오늘 나의 신앙이 십자가에 달린 천한 죄인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걸 믿는 신앙을 가졌는가가 먼저고, 다음으로 상대가 낮고 천한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지를 봐야 한다. 이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그저 다툼일 뿐 전혀 핍박이 아니다. 따라서 자기 신앙 역시 온전한 신앙이 아니므로, 누군가로 인해 신앙생활에 지장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건 환상이나 정신 승리일 뿐이다.

 

핍박의 정의는 낮고 천한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주장이 낮고 천한 죄인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지 말라고 강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낮고 천한 예수가 어떤 예수인지를 상고해야 한다.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진 예수께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게 맞는지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그런 신앙을 가지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을 가능성이 하나도 없다.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진 예수님께 세상에서 높아지는 걸 간구하는 게 이미 정상이 아니다. 당연히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을 수가 없다. 높아지기를 간구하는 예수를 믿고, 그걸 설교하고 가르치는 교회에 간다고 손해를 입는 건 핍박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징벌이다.

 

그렇지만 오늘의 이야기는 핍박의 정의를 바로 잡자는 게 본질이 아니다. 결국은 우리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지를 돌아보자는 이야기다. 사도들도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에게 어떻게 하느냐와 무관하게 그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걸 전하는 그 하나를 기준으로 살았다. 이 믿음과 복음이 신앙의 뿌리이자 전부고, 이것이 핍박의 이유기도 하고 반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이유이자 근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예수 믿는 걸 두려워한다.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진 예수가 그리스도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를 믿으면 자신도 낮고 천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핍박하는 사람들은 이 상식적인 논거를 알고 있다. 어쩌면 이들이 예수를 더 정확히 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를 믿어서 세상에서 낮아지거나 높아지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낮고 천한 신분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기 때문인데, 그건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거나 말거나 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신 게 바로 이것이다.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진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으면 가난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이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건 돈이나 권력과 같이 세상이 가치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굳어 있는 어떤 기준들이 하나님 아들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믿는 것이다. 즉 육신의 형편이 어떻든 하나님 아들이 되고, 복음을 전하고 말할 수 있다는 걸 믿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믿음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많다. '그래도 예수 믿는다면 잘 살아야 사람들이 그걸 보고 예수 믿지!'라는 일상적인 말이나, '설교하려면 신학교는 나와야지', '강대상에 오르려면 강도사는 되어야지'라는 말들을 선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바로 그 사람들이다. 이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게 불편한 사람들이다. 가난해서 씻지 않은 발로 교회를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하고, 강도사나 목사가 아닌데 강대상에 올라가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건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걸 믿는 걸 반대하는 사람이다. 즉 예수를 핍박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가르치는 게 바로 핍박이다. 이 핍박은 세상 기준으로 자신이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처럼 낮고 천해지는 걸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대로 되지 않지도 모르는 두려움에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진 예수는 그리스도여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이 예수 믿을수록 잘 산다고 말하고 싶고, 자격이 있어야 강대상에 오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어 전하시고자 한 복음은 세상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대로 사람이 자기 인생을 살기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목적대로 사는 존재로서의 사람은 그 삶이 평안하다. 이건 가난이나 부유함이나 신학 수학의 유무와 별개의 문제다. 존재가 존재로서 존재하는 목적을 아는 근원적인 안식과 복의 문제다. 이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존재로서의 목적을 아는 온전한 존재로 삶을 산다. 이게 모든 복의 시작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저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렘 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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