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18:24 – 19:7)
바나바와 다투고 갈라선 후 실라와 함께 시작(행 15장)한 바울 사도의 2차 선교 여행은 18장에서 마친다. 이 끝무렵에 아볼로를 만난다. 그런데 성경에 능한 아볼로지만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 이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하나님의 도를 더 설명하므로 아볼로가 성령 세례를 알게 된다. 성령이 임한 것이다.
그런데 성령 세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볼로만이 아니었다. 바울이 잠깐 들른 에베소에서 온 제자들도 아볼로처럼 같이 성령 세례를 알지 못했다. 이에 바울 사도가 예수의 세례를 전했더니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 방언하고 예언도 했다. 이때 바울 사도는 이들에게 직접 세례를 베풀었다. (후일에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책망할 때 바울은 자신이 세례를 많이 베풀지 않은 걸 다행이라 여기며 몇몇만 세례를 행했다고 했는데, 그들이다)
우리는 세례가 물세례와 성령 세례 혹은 불세례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차이를 명확히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 이 차이를 분명히 모른다는 건 단지 이해의 부족이 아니다. 그건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증거다. 자기가 물세례와 성령 세례 모두를 받았다면 너무나 당연히 그 둘의 차이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건 세례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영역이다.
성경에 나오는 세례에 관한 언급을 바탕으로 정의하면 물세례는 세례 요한의 세례로 정의된다. 또 하나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면 몸을 씻은 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에 제자들의 발을 씻길 때 베드로가 몸을 씻겨 달라는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몸을 씻은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신 말씀에 나온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물세례와 성령 세례의 구분점이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몸을 씻은 자는 물세례를 받은 것이고, 발을 씻은 자는 성령 세례를 받은 것
세족의식과 세례의 구분은 연관성이 부족해 보인다. 그런데 베드로의 변화를 살피면 몸을 씻은 자와 발을 씻은 자는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과 받은 사람의 차이라는 걸 확연히 알 수 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성령 세례, 불세례 혹은 예수의 세례가 어떤 것인지 예수님의 말씀과 베드로의 변화를 통해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발을 씻기실 당시 온 몸을 씻었다는 베드로의 상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반면에 후일에 성령이 임하신 후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믿고 전했다는 걸 고려하면 몸을 씻은 자와 발을 씻은 자의 차이를 알 수 있는데 그 결정적 차이가 성령이다. 즉 성령 세례가 어떤 것인지 세족의식 때 예수님의 말씀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을 때 예수님을 두고 모두 도망갔다는 점에서 같아 보이지만,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와 베드로를 포함한 11명의 제자는 전혀 다르다. 마지막 유월절 만찬 그러니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예수님께서 몸을 씻은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시면서도 가룟 유다를 염두에 두고 모두가 그런 건 아니라고 하셨다. 가룟 유다는 발만 씻으면 되는 상태도 아니라는 뜻이다. 이 차이는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믿음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는 게 예수님을 믿는 전부가 아닌가 생각하겠지만 그게 아니다. 모든 복음서 마지막 부분에서 제자들의 심리가 깊이 있게 기록되었는데, 그들 변화의 구분과 핵심은 성령이다. 성령이 임하시기 전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건 믿었지만,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다는 건 이해하지 못했다. 여러 차례 설명한 대로 성령은 이걸 알게 하시는 분이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탄생을 두고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말하는데 또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건 예수님은 우리의 표상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잉태와 정체성은 곧 우리의 거듭남과 정체성이다. 이걸 모르면 성령 세례를 모르는 것이다.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성령이 오시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이건 기독교 신앙에서 너무 중요한 포인트인데, 이게 거의 이야기되고 있지 않다.
신학을 <공부>한 목사에게 들은 설교 속에는 성령이 없다.
이는 신학교 나온 목사들에게 설교를 들은 이유가 가장 큰데, 이유는 성령이 오시면 모든 걸 알게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학문으로 공부하고 스스도로 우리가 다 알 수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성령이 있을 리 만무하고 그런 사람의 말을 듣고 성령을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건 너무나 상식적인 논리다.
다시 물세례와 성령 세례로 돌아와서 우리는 이제 성령 세례를 더 명확히 이야기 해 보자. 불세례 곧 성령 세례의 본질은 성령강림이다. 그리고 성경은 성령이 임하는 게 어떤 것인지 엄청나게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아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사람들은 그렇게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즉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한 대로 성령이 임한 변화를 겪은 사람이라면 성경이 이를 얼마나 많이 그리고 상세히 말씀하고 있는지 알 것이고, 그렇다면 이를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은 성령을 기적을 일으키는 신비한 영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다.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 세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
성령 세례의 핵심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진다는 걸 믿고 이해하고 자신도 그런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데 순종하게 변화되는 것이다. 그것도 신념이나 노력이 아니라 본성에 의해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게 성령 세례다. 그렇다면 구분도 명확하다.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예수님처럼 되려고 할 뿐 예수님과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걸 오히려 미덕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본성에 의한 순종이 아니라 자기 노력 곧 행위로 이루려는 순종이다. 그건 순종도 아니고 거듭남도 아니며 그리스도도 그리스도인도 아니다.
성령이 오셔서 깨닫게 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다. 성령이 깨닫게 하시는 일련의 기적을 성경은 거듭나는 것이라고 분명히 그리고 여러 번 말씀하신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게 그것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 그리고 그 거듭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오히려 세상에서 낮아져서 자기 육신을 수고하는 자리에 내어주는 본성으로 사는 존재로 생명이 바뀌는 게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게 성령 세례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게 바로 성령 세례
아볼로나 에베소 지방의 사람들이 몰랐던 성령 세례도 이것이다. 그들이 몰랐다는 건 성령 세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건 믿지만,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 세상 가치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는 게 하나님 아들의 본성이라는 건 믿지 못하는 상태가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건 예수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삶을 산다는 의미다. 다시 한번 이건 노력의 영역이 아니라 그런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다시 나서 그 생명 본성대로 살 수밖에 없는 생명 세계의 이야기라는 걸 분명히 해 둔다.
성령 세례는 생명을 바꾸는 것, 노력으로 이를 수 없다.
십자가를 진다는 건 위험이나 손해를 앞장서서 감수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건 모두가 동격 혹은 같은 상황에서 나서는 일이지만 더 의로울 뿐 아니라 하나님 아들인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육신의 수고를 감당하는 것, 그것도 그런 상황이면 본능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살아가는데 그것이 그 사람 인생의 목적이고 의미며 감사와 기쁨인 생활 그게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며, 성령 세례를 받은 삶이다.
이 삶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처럼 세상에 없는 진리다. 세상에 없다는 건 세상의 가치를 의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의 세계에 없다는 뜻이다. 거듭난 사람들에게 이건 일상이고 상식이며 어린 생명도 다 이해하는 세계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자신이 그 세계에 속하지 않았음에도 그냥 교리가 그러니까, 교회에서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줄로 알고 살아간다. 큰 낭패에 빠지는 건 몰라서가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새겨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오늘 나는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돌아보는 게 중요하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자신이 성령 세례를 받았다면 이 구분은 반드시 명확해야 한다. 이건 기억의 문제조차 아니다. 생명의 본성에 관한 문제다. 사람은 자기가 사람이란 걸 인식하듯 성령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로 거듭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이 그렇다는 걸 안다. 더욱이 이건 생명으로 난 것이기에 버릴 수도, 떠날 수도 없다.
지금 나는 과연 그런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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