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19:8-20)
성령 세례를 전하고 또 얼마의 사람에게 세례를 베푼 후 바울 사도는 에베소의 회당에서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를 강론했다. 하지만 모두가 순종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이 훼방했고, 바울 사도는 이를 피하여 두란노 서원에서 강연을 이어갔다.
이런 바울 사도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많은 능력을 행하게 되었는데 심지어는 아픈 사람에게 바울의 손수건만 얹어도 병이 낫고 악귀가 떠날 정도였다. 그러자 어떤 마술하는 이들이 악귀 들린 자를 대하면서 '바울이 전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명한다'라고 할 정도였다. 복음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탐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 유대의 한 제사장인 스게와라는 사람의 아들 일곱도 예수를 빙자한 마술하는 이들처럼 행했다가 오히려 악귀들에게 요즘 말로 역관광 당하는 일도 생겼다. 이 일은 사람들에게 예수를 빙자하는 일의 두려움을 알게 했고, 오히려 예수의 이름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심지어 마술하는 이들이 은 오만의 값어치가 있는 자기들의 마술책을 스스로 불살랐다. 예수를 빙자하기도 했던 이들이 온전한 믿음을 얻게 된 것이다.
악귀가 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행 19:16-16)
우리는 여기서 마술사나 제사장의 아들이 왜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했는지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한다. 카네기가 말하기를 '죽은 개를 발로 차는 사람은 없다'라고 했는데, 빙자할 가치가 없다면 굳이 쪽팔리게 남의 것을 흉내 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의 이름을 빙자한 이유는 복음 자체가 아니라 복음의 능력, 즉 열매를 탐했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름을 빙자한 건 복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복음으로 나타나는 능력을 탐했기 때문
바울이 전한 복음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걸 믿는다는 건 곧 구원이요, 믿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그리스도로 살게 된다는 걸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본성이 된 사람이다. 낮은 마음으로 서로를 섬기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고 예수 이름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낮아지는 법을 전했는데 오히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고 앙망하는 능력, 세상의 기준으로 아주 높은 가치를 가진 능력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자 이 놀라운 능력에 대한 욕심과 동경이 생겨 이를 도용한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의 본질은 모르겠고 그저 열매이자 나타나는 능력만 탐한 것이다. 이는 내용 없이 형식을 탐하는 것으로 사랑 없이 간음하는 창녀의 모습이며, 속은 썩었는데 겉만 화려한 회칠한 무덤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도적질이 통할 리가 없다. 스게와라는 제사장의 아들들이 오히려 악귀에게 되치기 당한 건 당연하다. 사람들은 복음의 본질은 외면한 채 능력과 열매만 취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허술한 분이 아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는 일은 의외로 만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과 다르게 예수를 믿는다면 그게 바로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낮아져서 서로를 섬기는 마음을 표현하시고자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이 이 뜻을 바로 알도록 아들을 이 땅에 보내서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게 하셨는데, 오히려 사람들은 그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서 세상에서 이기고 높은 자가 되려하니 이것이 바로 예수의 이름을 빙자한 것이다.
오히려 예수를 믿어 높은 자리에 올라 그 권세와 재력으로 사람들에게 베푸는 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발을 씻기는 섬김이 아니라 적선하듯이 복음을 전할 궁리만 하고 있다. 결국 목적은 섬김이 아니라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의 지위와 권력과 재력을 가지는 게 목적이다. 이 목적이 하나님께서 예수의 이름을 주신 목적과 다르니 예수 이름을 빙지한 것이다.
그러면 예수의 능력은 또 자기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이름을 믿으니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며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건 소위 말하는 정신 승리일 뿐 그렇게 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도 '주여, 주여' 부른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고 하셨고, 심지어 악귀들도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지만 너는 누구냐?'며 역관광을 한다.
낮고 천한 자리인 십자가에서 나오는 복음의 능력
하나님의 복음은 낮고 천한 십자가의 자리에서 능력이 나온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비밀을 알고 보니 그건 낮아지는 것임을 아는 게 복음이며, 복음을 이렇게 바로 알 때 능력이 나온다. 에베소의 마술사들이 비싼 마술책을 불사를 정도로 놀란 복음의 실체가 이것이다.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믿었더니, 세상이 가지지 못한 능력이 나오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복음이고 예수 이름의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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