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19:21-41)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로서는 가는 곳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과 우상 숭배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에베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은 지역이 아니라고는 해도 예수의 능력이 탐나 이름을 빙자했지만 진정한 능력을 깨닫고 귀한 마술책을 태워버린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지역인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자기 생계가 위협받는다는 생각에 크게 분노한 사람도 있었다.
당시 에베소 사람들은 아데미라는 여신을 섬겼다. 아데미는 그리스 신화에 속한 신으로 제우스의 딸이자 자연과 생명의 신(로마 신화의 다이애나와 동격)이다. 아데미는 형상을 가진 우상으로 조각되었는데 주로 가슴이 여러 층인 여자의 형상이었다.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신이었다. 이 신을 섬기기 위해서 많은 것을 은으로 조각했었는지 은장식을 만드는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직원을 데리고 있었다는 점에서 나름 규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우상에 대해 바로 안다면 아데미라는 여신은 우상의 일종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모든 우상은 풍요와 다산을 바라는 사람의 갈망이 만들어낸 존재기 때문이다. 결국 우상이란 사람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육신의 풍요와 평안과 성공을 기대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그 자체다. 따라서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는 건 굳이 우상 관련 사업에 종사하지 않아도 삶의 몰락을 의미한다.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자체가 생계가 몰락하는 것
특히 이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큰 착각을 하고 있다. 불상이나 다른 우상을 섬기고 절하지 않으면 우상 숭배가 아니라고 믿는 게 그것인데, 앞서 설명했듯 우상은 육신을 본질로 보고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바라는 마음이 형상화된 것이다. 그러니까 굳이 형상에 절하지 않아도 그런 마음으로 어떤 신을 섬긴다면 그 신은 유무형을 떠나 다 우상이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또 집이나 산에서 하나님께 육신의 문제만 구하고 있다면 그들이 부르는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이라고 부를 뿐 실상은 그들의 우상이다.
달리 생각할 거 없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떠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걸 두려워하는지를 보면 된다.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면 사업이 망할 거 같다면 그 하나님은 우상이다. 에베소의 은장이들과 같은 입장이다. 하나님이 떠나면 시험에 떨어질 거 같다면 그 하나님도 우상이다. 건강이 악화되거나 회복되지 않을 거 같다면 그 하나님도 우상이다.
섬기지 않으면 육신의 생계가 영향을 받는다면 하나님이라 부른다고 해도 우상이다.
삶의 생계로 정의되는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 관한 하나님의 관점은 분명하다. 우리의 필요를 다, 충분히 알고 계신다. 이는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 분명하기에 그 목적 달성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당연히 아실 수밖에 없다. 자동차를 사는 사람은 기름을 넣어야 한다는 걸 당연히 여기는 것과 같다. 그걸 담보로 우리에게 믿음이나 섬김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걸 요구한다면 단 1의 예외도 없이 우상이다.
하나님을 바로 믿는다면 이것이 확실히 구분된다. 그러나 이게 구분이 되지 않거나 '그래도 사람이 먹고 살기는 해야지?'라는 변명을 버릴 수 없다면 그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상이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다. 달리 검증할 거 없다. 이 신앙을 떠나면 경제적으로 힘들고 육신의 건강이 나빠질 것 같은가? 그러면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에베소의 아데미 여신과 관련된 소동이 이를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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