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20:13-38)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남쪽으로 30~50Km 정도 떨어진 밀레노스에서 3차 전도 여행을 마친다. 이때 사도 바울은 사람을 에베소에 보내서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고 고별 설교를 전한다.
바울 사도의 고별 설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은 고난이 따르며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늘 침략받을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평안과 기쁨을 주는 구원을 얻었는데 오히려 고난을 받는다는 측면에서 의아함을 낳는다. 항상 기뻐하라고 말한 바울 사도 자신은 고난을 받았는데, 고난의 고통이 기쁨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의문을 풀어가는 시작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 분인지를 믿는 믿음이 이런 의문을 해소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아니라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렘 29:11)
주목할 것은 성령이다. 성령께서 바울 사도에게 여러 가지로 고난이 있을 것임을 알려 주셨다는 것이다. 고난과 곤란은 어쩌면 졸지에 당하는 게 어쩌면 나을 수도 있다. 당하기 전까지 적어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바울 사도에게 고난이 있을 것임을 먼저 알려 주셨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시는 분이 성령
그러나 이는 성령께서 고난이 있을 것임을 따로 이야기했다기보다 성령의 직임을 인함이다. 성령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시는 분이다. 성령은 우리가 십자가를 질 것임을 알게 하시는 분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로 살게 될 것이라는 건 성령이 오셔서 알게 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강림과 세례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며, 십자가를 진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듯이 고난이다. 바울 사도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자고 권면하기까지 했다. 성령은 고난 당한다는 이벤트를 알려 주시는 분이 아니라 고난의 상징인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게 하나님 아들로 사는 것임을 알게 하신다. 바울 역시 이 관점에서 말씀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그렇다고 십자가를 진다는 게 고난만 있는 삶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고난의 본질이다. 존재에게 있어 고난은 무엇이냐를 아는 게 중요하다. 존재는 존재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이 목적에서 벗어나면 고난보다 더한 무쓸모의 존재가 된다.
게다가 사람은 유일하게 자기가 존재한다는 걸 인식할 뿐 아니라 스스로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탐구하는 유일한 존재다.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대상에게 직접 창조 목적이 있다는 것과 그 내용을 알려 주신 존재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 가장 큰 재앙은 자기 존재의 목적을 모르는 것이다. 이건 고난 수준이 아니라 재앙이다.
존재의 목적을 모르는 건 고난의 차원이 아니라 재앙 그 자체
따뜻한 게 아무리 좋아도 시원함을 선사하는 아이스크림에는 재앙이다. 또 몸이 상하지 않고 보존되는 게 아무리 복이라고 해도 자동차 브레이크 패드가 자기 몸이 상하지 않는다면 자기뿐 아니라 운전자의 생명을 해치는 위험이 된다. 흔히 자주 비유하는 초도 마찬가지다. 아이스크림이나 브레이크 패드 그리고 초는 다 존재하는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평안과 복락을 떠나야 한다.
존재에겐 일반적인 복락이나 평안보다 자기가 존재하는 목적이 더 중요하고 선행되어야 할 가치다.
이처럼 존재에게는 존재 목적이 가장 중요하다. 존재 목적보다 일반적인 복락과 평안을 추구하면 안 된다. 성경은 그런 자세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일갈한다. 이걸 간과하면 안 된다. 복락과 평안은 내가 존재하는 목적을 이룬 다음의 이슈지 그게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목적을 벗어나 일반적인 평안과 복락은 오히려 재앙이 된다. 이건 순서가 바뀌면 안 되는 일이다.
존재는 존재 목적과 정체성을 고려하지 않고 고난을 정의할 수 없어 …
그런데 사람은 이런 목적과 별개로 고난을 생각한다. 우선 육신의 평안과 복락이라는 상대적 개념을 기준으로 고난을 정의한다. 정작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알고 그 목적대로 사는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고난에 대한 개념이 잘못된 것이다. 이런 개념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고난받은 예수님께 받은 복음으로 살겠다면 육신의 평안과 복락을 간구하게 된다. 무엇이 기쁨이고 평안인지 모르는 건 너무 당연한 이치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지금으로선 상상도 하기 힘든 고난을 받으면서도 복음을 전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고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 사람에겐 가장 선행되고 중요한 사람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이다. 육신의 평안과 복락은 그다음 과제이자 문제다. 바울 사도가 부유함에도 궁핍함에도 거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 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다시 성령의 정체성으로 돌아가 보자. 성령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시는 분이다. 십자가를 지는 존재가 그리스도라는 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로서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하심으로 우리도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자체로 십자가를 지는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는 의미로 확정된다. 그렇다면 고난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셈이다.
그리스도로 살아가면서 겪는 가장 큰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큰 고난이나 힘겨움은 없다. 역설적으로 이 고난이 없다면 그리스도로 거듭난 게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 돌아가면서부터 고난을 받을 것임을 알면서도 삶을 후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아는 일로 받는 고난은 모르며 살아가는 곤고한 인생에 비할 바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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