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21:1-16)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사도를 향해 제자들과 여러 성도들이 바울 사도를 만류한다. 두로에 머무는 동안 성령의 감동을 받은 제자들이 성령께서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고난받을 것을 예언하신다며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했고, 가이사랴에서는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빌립의 딸도 바울 사도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한다. 심지어 빌립 집사의 딸은 바울의 띠를 가지고 자기 수족을 매는 퍼포먼스를 행하면서까지 바울 사도의 운명을 예언했지만 바울 사도는 굽힘 없이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 보면 성령께서 운명을 알려 주시는데도 굳이 예루살렘으로 가려 하는지, 또 바울 사도는 어떤 잘못을 했기에 고난을 받게 되는지가 의문스럽다. 만류하는 이들이 자기 이익을 위한 것도 아니고, 그들이 무당이거나 잡신에 접한 예언을 하는 것도 아님에도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렇지만 의외로 바울 사도의 예루살렘행을 이끄는 분은 성령이시다. 사도 바울의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알려 주시는 건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 가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가면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건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바울 사도의 예루살렘행은 성령의 예언을 거역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령을 거역하는 게 아니다 순종하기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
예루살렘에 간다는 건 고난을 받고 심지어 죽임을 당한다는 것임을 바울 사도도 알고 있다. 그러나 바울 사도에게 닥칠 이 위협은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신앙과 다른 믿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를 죽이려는 시대적 상황이 만든 위협이 아니다. 이건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운명이다. 마치 결혼한다는 건 자기 인생이 축소되고 아이를 위한 헌신과 가족으로 살아가는 헌신만 요구하는 삶으로 던져지는 걸 알면서도 결혼하는 사람의 본능과 같은 것이다.
앞서 우리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성령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게 하시는 분이라는 걸 이해하려 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하셨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로서 사는 삶을 초대하신 것이다. 그건 우리도 십자가를 지는 운명으로 거듭나기를 청하신 것이고, 그게 바로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고난이 예견되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건 성령이 충만하고 그 성령을 전하는 사도 바울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바울의 위대함을 찬양만 할 게 아니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 그리고 많은 사도들이 불 보듯 뻔한 고난에도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따라 고난에 순종했다는 건 그들이 전한 복음을 믿는 우리 역시 같은 순종을 살아야 한다는, 아니 그렇게 살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 어쩌면 이 운명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운명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의 고난은 예수님의 십자가나 사도들의 순교에 비할 바는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자기 십자가가 있고, 우리는 그 십자가라도 바로 지고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대로 살아가야 한다. 이 Have to는 의지의 영역이 아니다. 우리가 고난을 감수하면 나의 십자가를 억지로라도 지려고 노력하는 세계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이고 그 생명의 본성대로 사는 건 노력으로 될 수 없다.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다시 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거듭난 삶을 산다면 나름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산다. 그게 어떤 이들에게는 육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엄청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육신의 목숨을 던져 헌신하는 일은 신앙의 세계뿐 아니라 모든 세계와 영역에서 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엄청난 일이다. 우리가 사도들에 대한 존경을 깊이 간직한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비록 우리가 그런 엄청난 고난에 참여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나름의 십자가와 고난이 다 있다. 이 고난은 성령이 인도하신다.
성령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모든 사람을 고난, 곧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인도하신다.
성령이 담금질하듯이 우리를 고난에 이끄시는 건 아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는 게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지극히 고난에 속한다. 자기 육신의 수고를 내어준다는 건 누구나 하기 싫은 일인데 이 일을 본능으로 행하게 되는 존재가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거듭난 사람이다. 성령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길로 인도하신다. 그럴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고난이 있음에도 거역하지 않는 삶의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 물론 이건 굳이 작심하지 않아도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자기 운명이 그렇다는 걸 살면서 알게 된다. 한국에서 남자로 나면 군에 가야 한다는 걸 알게 되는 것처럼, 여자로 난 사람은 엄청난 고통에도 출산을 하게 된다는 걸 할게 되는 것과 같다.
역설적으로 자기 삶에 고난, 곧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 있을 거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면 아주 어리거나 그리스도로 거듭난 상태가 아니다.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고난 당한다는 걸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가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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