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는 다니엘 성경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니엘이 예언한 대로 바벨론이 멸망하고 세워진 페르시아(메데-파사) 때의 일이다. 에스더에 나오는 아하수에로는 바벨론의 벨사살 왕을 멸망시킨 고레스의 아들이다. 그리고 에스더는 그의 아내 곧 왕후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죽으면 죽으리다”라는 문구는 에스더의 말이다.
에스더는 다음과 같은 6가지 이야기로 나눌 수 있다.
- 먼저는 아하수에로가 베푼 잔치에 왕후인 와스디가 왕의 청함을 거절함으로 폐위되는 일
- 다음으로 에스더가 왕후가 되는 과정
- 모르드개가 반역을 알아내어 미리 막는 사건
- 하만의 실권 장악과 그에 굴하지 않는 모르드개로 인한 갈등
- 모르드개를 비롯한 모든 유대인을 말살하려는 하만의 계획과 이를 막아내는 모르드개와 에스더
- 무림절의 제정과 규례
그렇다면 이런 일련의 사건과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마음과 뜻은 무엇인가?
재밌게도 에스더는 육신으로 남녀의 지위 차이, 그러니까 페미니즘이나 여성 해방 혹은 진보적 정치 성향의 사람들이 경기를 일으킬 내용으로 시작한다. 왕인 남편이 부르는 자리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왕비를 폐위하는 일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건 폐위의 명분이다. 왕의 명을 거역했다는 게 핵심적 이유가 아니라, 남편이 부르는 데 오지 않은 왕후를 벌하지 않는다면 모든 가정에서 남편이 무시당할 것이라는 게 쟁점적 이유다.
왕후 와스디의 폐위는 가부장적 세계관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잠시 오늘날 시대적 상황을 보면 젠더 갈등이라는 부인하기 조금 어려운 시대적 갈등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 갈등의 한 축인 페미니즘이나 여성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아하수에로의 아내이자 왕후인 와스디가 단지 왕이 부르는데 오지 않았다는 일이 나라의 모든 가정에서 남편의 권위가 추락하는 명분을 주므로 폐위시킨다는 게 달갑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의 남녀 이야기는 육신으로 남자,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성경 속 남녀 이야기를 육신의 성별에 따른 이야기로 보는 건 눈에 보이는 대로 믿는 신앙이고, 외모로 사람을 판다는 것이며, 글의 행간을 읽지 못하는 어리석은 관점이다. 이 어리석은 관점이 하나의 교단이 되어 있기도 하다.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개념 때문에 주목받는 그들의 교리는 안타깝지만, 성경의 행간을 읽지 못하는 건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놀랍게도 에스더서 1장에서 이방인의 왕인 아하수에로는 하나님의 역을 맡은 배우고, 왕후인 와스디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사람의 모습 그 자체다. 게다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는 여성성을 가진다. 이 사건의 구조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게 창조한 사람에게 그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했으나, 자기 의를 좇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다. 오늘의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 주제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잠깐 성경 속 남녀의 의미를 살펴보자.
성경에서 남성은 의를 가진 존재를, 여성은 형식을 가진 존재를 뜻한다. 따라서 여자가 더 온전한 복음을 가지고 남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육신은 여자지만 성경이 말하는 남성이 되고, 말씀을 듣는 남자는 육신은 남자지만 성경이 말하는 여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의 본체이기에 아버지 하나님이 되고, 신랑 예수가 되는 것이지 육신으로 남자의 우월성을 성경이 보장하고자 함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고 성경을 봐야 한다.
이 관점을 이해했다면 에스더를 시작하는 시점에 기록된 원래 아하수에로의 아내이자 왕후였던 와스디의 폐위 이유를 알 수 있다. 더 분명하게는 성경이 이 일을 기록한 이유, 이 일로 우리에게 주시려는 교훈을 알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따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버림받는다는 단순한 진리를 설명한다. 다시 한번 이건 남자의 말을 순종하지 않은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한다.
따라서 왕후 와스디는 개인적 일탈이나 모는 성격은 화를 부른다는 걸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그 일로 왕후를 본 나라의 모든 아내가 남편을 거역할 것이라는 주장으로 폐위하는 남성 우월주의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이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무엇보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 곧 뜻에 대한 사람의 순종에 관한 말씀이다.
아하수에로는 와스디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가 베푼 연회에서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싶었다. 그의 이 마음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기대하고 보시기에 좋았던 사람의 모습을 사람에게 기대하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런데 사람은 와스디처럼 그 마음을 배신했다. 그 결과는 와스디가 폐위되듯 만족의 동산, 곧 만족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렇다면 이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사건이고, 어떤 성경인지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보시기에 좋은 모습을 기대하신다. 그러나 사람은 와스디처럼 이를 거부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 그게 어떤 모습인지 우선은 궁금할 텐데 결론적으로 변화산에서 예수님을 보고 “내가 기뻐하는 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보듯이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모습을 기대하신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모습이 아하수에로가 자랑하고 싶은 듯 아내 와스디의 모습처럼 하나님이 사람에게 기대하는 모습이다.
사람은 와스디처럼 그 모습을 상실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살기로 순종할 수도 있고, 거역할 수도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 자기 의지로 순종한 게 아니라 아바타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않는다. 게임할 때 치트키를 쓰면서 하면 의미 있는 재미가 없는 것과 같다. 그렇게 주신 의지로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걸 선택했다. 문제는 그 선택으로 이른 사람의 정체성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다.
이렇게 와스디처럼 첫 번째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났다. 에덴이 만족이라는 의미므로 만족을 상실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뜻이다. 자기 삶에 만족 없는 사람의 모습, 그게 바로 에덴에서 쫓겨난 모습이다. 역설적으로 사람이 만족 없이 산다는 건 모든 사람이 죄인인 증거다. 그래서 다음으로 두 번째 아담이 왔다.
어쨌든 하나님은 육신을 가진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보시기에 심히 좋은 모습을 기대하신다. 에스더가 두 번째 왕후로 위를 받는다는 건 결국 하나님 앞에 여자인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에스더서는 바로 이런 성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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