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는 다소 소설 같은 분위기지만 신학자들의 분류로 역사서다. 역사 사기 정도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에스더 역시 우리 구원을 말씀하시는 성경이다. 아하수에로의 왕후 와스디의 모습은 첫 번째 아담과 같은 우리 옛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에스더는 구원받은 새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는지에 대한 말씀이다.
왕후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싶었던 아하수에로 왕을 실망하게 한 와스디의 모습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을 버린 사람의 모습 그대로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 사람이 표현해 주기를 바라는 모습이 있다. 사람이 와스디처럼 이걸 거역한다면 벌 좀 받고 끝나지 않는다. 왕후가 폐위되듯이 사람이 존재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이게 에스더서의 교훈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건 사람에겐 선택사항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바라시는 바를 이루기 위해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즉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 와스디에세 바라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건 사람의 존재 목적 그 자체다. 창조주가 정한 존재의 목적을 상실하는 건, 설계자의 의도를 벗어난 공산품과 같아서 그냥 폐기된다. 이건 가혹한 게 아니다. 섭리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건 사람에겐 존재의 목적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건 어떤 것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했다. 형상은 이미지다. 성경 원문에 실제 image라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할 형식으로 육신을 가진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다. 아들을 보면 그 아버지가 누군지를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고 그렇게 표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의외로 낮아지는 마음, 겸손과 자비와 섬김이다. 사람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랑과 자비와 겸손하신 분임을 알게 하겠다는 것이다. 사람은, 특히 기독교인들은 “그래 하나님은 그런 분이지!”라고 어렵지 않게 동의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그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사람은 늘 위대하고 높아지는 걸 추구하고, 그런 것들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신 것들을 순종하지 않고 있다. 순종하고 있었다면 당연하게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 사람이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걸 성경은 대속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대속은 차비를 대신 내어 주듯 우리가 받을 벌을 대신 받은 일이 아니다. 와스디가 거부했듯 우리가 외면한 우리 정체성이자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낮고 겸손한 마음이다. 정말로 이걸 믿는다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의 성공을 구하는 패역한 기도는 이제 그만하는 게 좋을 듯하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자랑하고 싶어 하시는 건 낮은 마음이 본성인 사람의 삶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낮은 마음을 원한다. 다만 노력으로 이룬 낮은 마음을 원하시는 게 아니다. 천국에서 황금 면류관을 얻을 목적으로 낮아지는 것이나 세상에서 복을 받겠다는 목적으로 낮아지는 건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낮아지기를 노력하고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 본성이 낮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 구원이 거듭남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성이 바뀌려면 생명이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낮아지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되려고 마음을 다잡고 노력하는 게 일반이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노력은 한계가 있고, 모든 순간, 모든 상황에서 뜻한 대로 되는 게 아니다. 언제나, 쉬지 않고, 항상 낮은 마음으로 사는 유일한 방법은 마음이 낮은 생명으로 태어나는 방법뿐이다. 그래서 거듭나야 구원을 얻는다.
노력으로는 얼마간 낮은 자세를 보일 수 있지만 항상 그럴 수는 없다.
비록 사람이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모습대로 살지 않는다. 심지어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서라도 세상에서 높아지기를 바란다. 와스디처럼 하나님께서 원하는 뜻을 버렸다. 절대적인 비중으로 낮은 자세로 살았다고 해도 한 순간 높아지려는 본심을 드러냈다면 아무 소용 없다. 이건 율법과 같은 법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존재지 낮아진 모습, 낮은 자세로 살아간 순간들의 모음이나 공로가 아니다. 존재가 바뀐 게 아니라면 하나님의 뜻을 버린 것이다. 여기에는 자비가 없다.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낮은 마음이 본성인 사람이 되기를 스스로 버리고, 높아져서,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로 마음을 정한 증거는 세상에 넘친다. 교회는 화려해지고, 그 화려해진 교회에서는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의 간증이 넘쳐나고, 설교는 그런 성공을 위해서 낮은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라고 외치고 있다. 모두 단결해서 와스디의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와스디처럼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에스더서를 통해 엄히 말씀하신다. 바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버린다는 걸 사업이 망하고 건강을 잃어버리는 일로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집에서 용도와 목적을 상실한 물건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쓸모없는 존재는 존재 가치를 상실한다. 그에 대한 처분은 폐기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버리신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능동적인 주체로써 사람에게 어떤 일을 행사하시는 것 같지만, 실상은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버린다. 존재가 자기 존재 목적을 선택할 의지가 있는데 그 목적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건 스스로 자기를 망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스스로 굴러가지 않겠다고 정했다면 당연히 버림을 받는다.
이는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에덴에서 추방된 일로도 설명된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리력을 행사해서 에덴동산 밖으로 추방한 것으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에덴동산이라는 말은 ‘만족의 동산’이라는 말이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면 늘 자신을 정죄하므로 만족할 수 없게 된다. 이건 우리가 다 아는 본성(옛사람의 본성)이다. 우리가 스스로 정죄하고 있다는 건 구원받았다면서 회개하는 모습으로 증명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 지금의 길에서 돌아서야 한다. 높고 위대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어리석고 어두운 생각에서 돌아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와스디처럼 버려질 것이다. 에스더서의 시작은 이 법을 말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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