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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죄 사함 - 1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3. 18. 16:56 Writer : 김홍덕

어떤 죄의 사함을 받는 것인가?

죄 사함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근본적인 이유다. 오늘날 신앙인들에겐 그것보다 삶의 복을 얻는 게 더 중요하게 보이긴 하지만 사람이 신앙을 어떻게 생각하든 신앙의 본질은 죄 사함이다. 죄 사함에 있어 죄를 불순종과 같은 행동으로 보는 사람에게 실감이 나진 않겠지만 죄가 사해진다는 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생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걸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바의 회복인 만큼 우리에게도 중요하고 하나님께도 중요한 문제다.

 

죄 사함에서 생각해 볼 것은, 먼저 어떤 죄를 누구에게 사함을 받느냐는 것과 또 꼭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먼저 누구에게 어떤 죄 사함을 받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

 

죄 사함은 우선 사함을 받을 죄가 명확해야 한다. 살인죄를 범한 사람에게 절도죄를 사하는 게 의미가 없듯,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하나님께 사함을 받는 죄는 사람이 하나님께 범한 죄이어야 하고 또 그게 하나님이 보실 때 분명히 죄라야 한다. 사람이 아무리 죄라고 우기고 믿어도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지 않을 수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는데, 현실은 그게 혼합된 상태다.

 

사람들은 행위를 기준으로 죄를 판단한다. 하지 말라고 한 걸 하는 것, 하라고 하는 것을 하지 않은 걸 죄로 생각한다. 행위로 죄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는데, 그건 행위가 선악의 판단 기준이 아니라는 뜻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의 쟁점은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죄에 대한 기준이 명확히 다르다. 하나님은 존재를, 사람은 행위를 본다. 하나님이 보시는 죄에 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다. 죄는 자리를 떠난 것, 존재의 정체성을 벗어난 상태의 정의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해야 할 사람이 자기 생각으로 선악을 판단하여 삶을 결정하고 살아가는 상태를 말한다. 그 상태에선 남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어도 소용이 없다. 이건 아주 선명한 하나님의 뜻이고 또 말씀이다.

 

죄는 존재 목적을 벗어난 상태

 

행위를 죄로 판단하는 건 사함에도 한계가 있다. 행위로 인한 죄를 사하는 방법은 형벌의 면제뿐, 이미 행한 행위는 되돌릴 수 없다. 회개란 가던 길을 돌아서는 것이지만 행위로 죄를 판단하면 그럴 수 없기에 완전한 회복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기억은 죄 사함을 받았다면서 기도할 때마다 회개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하여간 행위 기준으로 죄를 판단하는 건 분명 하나님의 기준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전 장에서 이야기했듯이 하나님 앞에 사람의 죄, 근원적으로 선악과를 먹은,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가진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 사함이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걸 회개해야 제대로 사함을 얻는다.

 

그리고 이 죄 사함에는 온전한 회복이 있다.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자리에서 떠났다가 돌아오면, 돌아온 탕자처럼 언제나 그랬던 것 같이 아들로 회복된다. 온전한 회복이 있는 회개가 있는 세계다. 아울러 새롭게 되었다는 말씀에도 부합된다.

 

사람의 창조와 존재 목적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죄 사함

 

다만 이 새로움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자격이 있는 누군가가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사람에게 보여 주고, 전해 주어야 사람이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일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존재 목적을 회복한 사람의 모습을 보이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죄 사함의 핵심이고, 열쇠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의 모습

 

사람들은 흔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은 걸로 생각한다. 행위를 죄를 판단하는 대상과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바와 같이 행위로 범한 죄에 대한 사함은 완전한 회복이 아니라 형벌의 면제 정도일 뿐이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게 되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죄 사함은 형벌의 면제나 대속함이 아니라 우리 존재 정체성의 회복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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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죄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3. 12. 10:16 Writer : 김홍덕

우리가 선악과를 논하는 건 <> 때문이다. 우리가 앞서 선악과를 이야기한 이유도 결국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라는 게 무엇이든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건 모두 사함을 받았다는 의미임에도 구원받았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면서 정작 기도할 때마다 회개로 시작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분명 심각한 모순이다. 물론 이런저런 변명 같은 말들은 있다. 이제 그런 이야기들을 하려 한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건 사람이 스스로 선악의 기준을 가지는 것인데, 사람이 자기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한 결과는 사람에게 유익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만족하지 않은 사람에게 삶은 행복하지도 않고, 괴로움 그 자체다. 죄지은 사람의 불안, 불편도 이렇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가 이것이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죄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다르다. 우선 죄의 어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죄를 의미하는 원어의 우리 발음은 '하마티어''자리를 벗어나다'라는 의미다. 자리를 벗어난 상태라는 의미로 여기서 말하는 '자리'는 좌표나 위치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리는 정체성으로 어른들 말씀으로 보면 본분을 벗어난 것과 같다.

 

예를 들어 조폭끼리 아무리 의리가 좋고, 서로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해도, 숭고해 보이는 그들의 행동은 모두 죄다. 심지어 그럴수록 죄가 커진다. 조폭이라는 정체성은 사람이 사회적으로 가져서는 안 되는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자주 예로 드는 간첩도 그렇다. 신분, 곧 정체성이 간첩인 이상 다른 사람이 하면 칭찬받을 선한 어떤 행위도 하면 할수록 죄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는데 여기서 말씀하시는 '어디'가 바로 정체성이다. 하나님의 물음은 숨바꼭질에서 친구를 찾지 못한 술래의 외침 같은 게 아니다. 이미 하나님은 아담과 대화할 수 있는 상태로 장소를 묻는 게 아니라 <정체성>을 묻는 것이다. 또 선악과로 인한 죄가 불순종이라면, "아담아,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라고 물으셔야 맞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라고 물으신 게 아니다.

 

그렇다면 아담이 가져야 하는 정체성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아담은 하나님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한 피조물이므로 어떤 경우에도 창조 목적을 벗어나면 안 된다. 이건 우리가 사거나 만든 핸드폰이나 노트북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의도한 통신이나 업무 SW 작동이라는 목적을 벗어나면 존재 자체가 짐, 곧 죄가 된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행동이 아니라 정체성, 창조 목적 안에 있는지 여부

 

사람은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할 존재다. 자기가 옳다는 걸 표현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자기가 선악의 기준으로 가지고 인생을 엮어 간다는 건 자기 의로움, 자기 목적을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그건 피조물의 자세도, 사람의 자리도 아니다.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사람은 존재 자체가 죄의 상태, 정체성이 죄인 상태다.

 

그렇게 자리를 벗어난 사람은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목적 안에 들어오기 전에 자기 생각이나 사회, 국가적 생각에 옳다고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죄다. 반대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삶의 목적, 삶의 의미, 삶의 본성이 된 사람은 어떤 것도 죄가 되지 않는다. 이게 가능한가 싶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바로 이걸 믿는 것이다.

 

우리가 정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건 일반적으로 사람이 죄를 판단하는 대상인 행동이 정체성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사람인 적군을 향해 총을 쏘는 게 나라는 지키는 군인으로서 한 일이라면 충성이 되지만, 군인도 경찰도 아니고 상대가 선량한 사람인데 총을 쏘면 범죄가 되는 걸 생각하면 된다. 총을 쏘는 행위가 쟁점이 아니라 누가 총을 쏘느냐가 쟁점이다.

 

성경은 죄를 이 관점에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사람이냐 아니냐가 심판의 기준이다. 심지어 사람을 죽이는 일에 대한 판결마저 가른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건 의로운 행위지만, 가인이 아벨을 죽인 건 큰 범죄가 된다. 생명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만큼 이건 너무 쉽고 분명하고 확실한 기준이다. 이 하나를 믿는 게 하나님을 믿고, 거듭남을 믿고, 죄가 사해진다는 걸 믿는 믿음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면 거듭나기만 하면 도둑질해도 되느냐?"라고 반문한다. 우선 분명하게 말하는데, 이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을 도둑질도 하는 생명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반문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도 도둑질하는 본성은 그대로일 것이라는 가정에서 하는 질문이다. 이건 논쟁의 가치조차 없는 생각이지만 사람들은 이 생각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게 사망의 권세에 잡혀 있는 증거다.

 

죄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 정체성의 문제다. 형식적으로는 행위가 심판의 기준이 되는 건 맞다. 그러나 행위는 존재 정체성에서 비롯된다. 행여 행위가 선해도 존재 정체성과 다르면 거짓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 안에 (사도 바울이 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의 행동은 설령 선한 행동이어도 거짓되고 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느냐?"라고 묻지 않는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는 존재냐?"를 물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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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선악과 - 3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3. 5. 14:05 Writer : 김홍덕

선악과는 왜 에덴동산 중앙에 두었을까?

선악과는 만든 이유도 어렵지만(사람이 하나님과 다른 관점으로 봐서 그런 거긴 하지만) 왜 굳이 잘 보이는 곳 동산 중앙에 두었는지도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건 사실 많은 사람이 궁금해한다고 생각하긴 어려울 수도 있지만, 선악과가 나의 원죄라는 데 집중해서 바로 알려고 묵상하다 보면 좀 궁금한 문제기도 하다. 그런데 이 궁금증은 선악과를 만든 이유와도 연결되어 있다.

 

선악과와 관련해서 선악과 전후로 크게 바뀌는 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벗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악과를 먹으므로 삶의 터전이 바뀐다는 것이다. 벗어서 부끄러움을 알게 된 건 다음에 이야기하고, 여기서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쫓겨났다고 말하기보다 아담과 하와가 걷어차 버렸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우선 이 궁금증에 접근하는 데는 에덴동산이 어떤 곳인지를 아는 게 도움이 된다. '에덴'이라는 말은 '만족'이라는 의미다. 에덴동산은 만족의 동산이며, 만족한 삶 자체다. 따라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말은 만족하고 행복한 삶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선악과의 본질을 생각하면 스스로 선악을 판단한다는 건 곧 만족을 상실한 삶에 빠지는 것임을 알 수 있고, 놀랍게도 이건 우리가 모두 공감할 수 있다. 사람이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삶이 자기가 가진 기준 곧 선악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다.

 

선악의 기준을 가진 사람의 삶은 만족스럽지 않다.

 

생각해 보면 사람이 가진 가장 귀한 가치, 만족의 중앙에 놓일 가치는 만족과 행복이다. 그리고 그걸 결정하는 건 바로 사람이 가진 기준이며, 그 기준은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 달성과 미달로 나누면서 불만족을 형성하고 행복을 헤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이 가진 기준이 삶이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인 행복과 만족의 결정적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선악과가 에덴동산 중앙에 있었다고 하신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노리개로 창조하신 게 아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평안과 소망이며,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게 없는 게 우리 삶이다. 순종으로 이 모든 걸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순종해야 하는 건 우리가 하나님의 의와 선함이다. 사람이 옳다고 하는 것들로 사람이 마냥 행복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은 사람이 옳다는 주장이 세상을 시끄럽고 혼란스럽게 한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렘29:11)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딤전 4:4)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에덴동산 중앙에 두신 것은 굳이 별개의 나무를 특출나게 에덴동산 중앙이라는 위치에 두셨다는 걸 말씀하시고자 함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바는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우리 삶의 만족, 본질적으로 행복이 선악의 기준에 있다는 것이다. 그걸 내가 가지면(선악과를 먹으면) 만족한 삶을 걷어차는 게 될 것이고, 그게 아니면 선악과가 있든 말든 나의 삶은 만족스럽고 행복하다는 걸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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