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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나의 태초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3. 5. 13. 14:52 Writer : 김홍덕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하시는 것은 만드신 세상이 하나님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 세계가 천체 물리학적으로나 아니면 생물학적이거나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이 세계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나님의 세계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라는 것은 만들어진 것이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을 알 때, 그 만들어진 것이 하나님으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때 그 세계가 시작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학이 아무리 많아도 내가 입학할 때, 나에게 대학이라는 세계가 열리는 것이며, 무엇보다 대학을 세운 사람이 붙인 그 대학의 이름의 대학생이 되는 것이다. 마치 그것과 같이 하나님이 만드신 천지에 대한 태초가 열린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던 내가 하나님의 세계로 인정할 때, 하나님이 의도한 하나님의 세계가 받아들여질 그 때가 바로 나에게 하나님께서 만드신 태초가 열리는 것이다.



입학한다는 것은 새로운 학문의 태초

<사진은 영남이공대 2013년 입학식>


세상은 어떻게든 만들어졌다.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신앙 안에서 하나님께서 만드셨다고 믿는 것은 중요한 믿음의 뿌리지만,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 대한 태초가 적어도 나에게는 열리지 않았을 것인 것 같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더라도 내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으로,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의도를 알기 전 까지는 물리적인 세상을 아무리 숨쉬면서 인지하고 있어도 나에게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태초는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창세기 1장 1절은 물리적인 이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선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을 읽는 사람이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목적을 알아 하나님의 세계가 자기에게 열리는 그 때가 바로 그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태초가 시작된다는 것을 세상을 만드신 사건을 가지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천지창조는 그 물리적인 창조의 형태가 어떠하든 하나님께서 이것을 기록하여 우리로 읽게 했다는 것은 각 개인에게 있어 하나님을 믿는 세계인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때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심이 그 주 목적이고, 이 내용을 말씀 하시기 위하여 물리적인 세상을 만드신 것이다. 즉,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은 형식이고 본질은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을 믿는 세계가 한 개인에게 열리는 그 때가 그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 곧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태초라는 것이다.


이는 이 세상이 있다 해도 내가 태어나서 인지하지 못하면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어떤 분으로 계시든지 내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생길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의 세계가 나에게 열리는 태초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에 대한 개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신앙 안에서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일원론적 가치관이 생겼다는 것이고, 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 대한 시간 개념이 생겼다는 것, 즉 태초가 열렸다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창조라는 것을 물리적인 세상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만들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고, 그것을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서 그것을 믿는 믿음이 믿음이라 여기는 것이 창세기 1장 1절을 믿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어떤 말씀이라도 그것을 객관적으로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냥 공부다. 이 성경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받게 되는 그 시점이 생기기 시작하는 그것이 바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때, 시간에 관하여 크로노스적인 개념을 적용하듯, 또한 세계를 천지를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 물리적인 세상이 세상이라고 여기는 관념을 가지고 본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성경에 나오는 말씀들이 객관적으로 사실임을 믿는 것이 믿음으로 여긴다. 그런 믿음은 12시가 되면 점심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지키기 위하여 배가 고프지 않아도 또 아무리 배가 고파도 12시가 되어야만 점심을 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회사가, 혹은 조직이 정한 것을 지킨 것이기는 하지만 자기의 시간, 자기의 형편에 맞춘 것은 아닌 것이다. 즉 나와 상관없는 성경인 것이다.


성경에 어떤 말씀이 기록되었다고 해도 오늘 나와 상관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12시 점심시간을 지키는 것은 신념이지 자신의 생명에 맞춘 것은 아니듯이, 성경을 객관적인 사실로 믿는 것은 신념일 뿐,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즉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의 세계가 나에게 열리는 태초는 성경의 말씀이 나와 상관이 있는 말씀으로 들리는 그 시점이 바로 나에게 있어 하나님의 태초가 시작되는 것이고, 그것이 진정한 창세기의 시작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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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창세기 1장 1절은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성경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으로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왜냐하면 시간의 개념과 공간의 개념이 객관화된 문화혁명 이후의 이원론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사고 안에서 볼 때, <태초>와 <천지>는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시간과 형이하학적 공간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시간에는 두 가지의 시간개념이 있다. 하나는 크로노스(Chronos)라고 하는 객관적인 시간 기준이 있고, 또 하나는 카이로스(Kairos)라는 주관적인 기준이 있다. 크로노스는 달력과 같이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보편적이고 공통적이며 객관적인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개인별로 배고픈 시각이 다르듯이 아주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절대적인 관점에서의 시간이다.


또한 천지로 대변되는 세계 역시 두 가지의 개념이 있다. 하나는 지구, 또한 물리적인 공간으로 우리가 만질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된 세계가 있고, 또 하나는 과학의 세계, 신앙 세계와 같은 어떤 관념과 철학에 관한 범주를 세계라고 한다.


이렇듯 각각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진 시간과 공간에 있어 어느 것이 본질인가 할 때, 시간은 카이로스가, 세계는 관념의 세계가 본질이고 내용이고, 크로노스와 물리적 세계는 카이로스와 관념적 세계의 표현양식인 형식인 것이다. 사람이 먼저 ‘배고픈 때’라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기 때문에 12시에 점심 먹자는 시간을 정한 것이고, 생물학적, 물리적 법칙이 표현되어 세상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기준으로 보면 크로노스적인 개념 아래에서는 모든 것을 어떤 기준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한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점심시간을 정해 놓으면, 그 시간이 아닌 시간대에 점심을 먹게 되면 ‘왜 점심시간이 아닌데 밥을 먹느냐?’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즉 점심시간과 아닌 시간이 구분된다. 하지만 카이로스를 기준으로 한다면 자신이 배 고플 때가 점심시간인 것이다. 회사와 같은 조직체에서는 크로노스가 가족과 같은 공동체에서는 카이로스가 적용되는 것도 차이점이다.


세계라는 공간 혹은 영역 역시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거룩하고 회사는 거룩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물리적인 공간 즉 본질이 아닌 형식에 치중된 생각이다. 사람 자체가 거룩하면 교회에 있으나 회사에 있으나 거룩한 것이다.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축복도 이러한 맥락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만지는 것이 다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이다. 세상 역시 어느 건물에 들어가도 물리법칙은 동일하다.


이렇듯 시간에 대해서 크로노스적이고, 공간에 대하여 형이하학적 관념을 가진 것을 이분법적 사고라고 한다. 즉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점심시간에 밥을 먹으면 맞고, 다른 시간에 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나, 예배당은 거룩하고 회사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이 다 이런 가치관 아래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 이분법적인 시간과 공간개념 아래에서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아직 사람이 창조되지도 않았는데 누가 성경을 기록했는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루가 24시간인가 하는 것하며, 아담과 하와는 아들만 낳았는데, 가인이 얻은 아내는 어디서 온 것인가 하는 등의 객관적인 관념 안에서 창세기를 본다면 이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을 기록한 히브리인들은 이분법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동전은 앞뒤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동전의 가치로 보는 일원론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성경을 기록했는데, 이것을 이원론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해석이 난해해지는 것이다. 아니 엉뚱한 해석이 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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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가 이 아브라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시작되는 시작이라고 한 것은 이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도 아브라함(아브람)과 같이 다 위대함의 세계 안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가서 만났듯, 마태가 기록한 이 성경을 볼 때 본토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 마태복음에서 본다면 예수님이 보여주신 세계로 떠나 갈 때에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그 사람에게 열린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늘 위대함을 추구한다. 직장에 가면 더 높은 자리, 더 능력 있는 사람이 되려하고, 운동을 해도 그렇고, 어떤 것을 하든지 더 잘하려고 한다. 그러면 못해야 하나님의 세계인가? 할지 모르겠지만, 잘하려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잘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거나 그것이 사람의 의로움이라고 여기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것을 의롭다 여긴다는 것은 위대해지지 않으면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그렇게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아브람이 본토 아비 집을 떠났다는 것은 바로 사람이 위대해지는 것을 의로 여기는 가치관을 버리는 것이다. 그것을 버릴 때에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생명의 아비라는 뜻이다. 즉 위대함의 세계에서 떠나 생명의 세계로 떠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아버지가 아니신가?  즉, 생명이 모든 의의 기준이 되는 세계로 떠나는 그 출발이 있는 사람, 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마치 대학에 입학함으로 대학이라는 세계가 열리듯이 말이다.


그리고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떠나라”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말씀이기도 했다. 아브람이 그것을 믿고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이 있다는 것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믿지 않았는데, 어떻게 떠날 수 있겠는가? 아브람이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땅을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땅은 낮은 땅이라는 의미의 가나안이었다. 



<고향을 떠나는 아브람>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이 지명으로서 가나안이라는 것이 모든 본질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흙과 땅은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농부로 나오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 말씀의 씨를 땅과 같은 사람의 마음 안에 심으신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은 지명으로는 가나안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본토 아비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시는 말씀의 본질은 “위대함을 의로 삼는 사람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지정한, 하나님께서 정체성을 부여한  자리, 하나님께서 목적을 두신 자리로 떠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 자리는 아브람으로는 갈 수 없고, 아브라함이 되어야 가는 자리이며, 할례를 받은 후에 아들을 낳는 사람이 가는 자리요, 그런 사람의 본성을 가진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 본토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하신 말씀은 사람이 위대함을 좇는 자리를 떠나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여한 정체성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라도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라야 아브라함으로 시작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위대해질수록 의롭다고 여기는 것에서 떠나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믿고 위대함을 좇던 자리를 떠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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