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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죽음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3. 5. 3. 10:19 Writer : 김홍덕

지금도 세상에는 NGO와 같이 세상의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정의구현 사제단이다 뭐다, 또 무슨 단체다 하며 그 수를 다 아는 사람도 세상에 없을 만큼 많은 소리들이 있다. 그들의 주장을 다 하나로 모으면 <잘못되었으니 고치자 !> 그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고치자고 한다는 것은 뭔가를 보고 잘못되었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 선행되었기 때문에 고치자고 하는 것이다.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데, 왜 그런 소리를 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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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사람들이 세상에 있는 일을 보고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마음에 어떤 것은 선한 것이고 어떤 것은 악한 것이라는 판단 기준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선악과라고 하는 것이다. 아담도 선악과를 먹기 전에도 벌거벗고 있었지만 그것에 대하여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나니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게 여겨졌다는 것이다. 스스로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고, 그 마음 안에 벗고 있는 것은 악한 것이고, 입고 있어야 선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무화과로 몸을 가렸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도 신혼 부부라면 서로가 벗고 있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 에덴 동산이 둘 밖에 없는데 그게 큰 문제가 아닌데도 그 마음 안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가렸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것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전과 같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있는 것에 이름을 붙여주고,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전혀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해서 사람이 세상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말하고 주장하고, 또 어떤 것은 잘 되었다, 어떤 것은 잘못되었다 하는 관계로 방향이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이 수동적인 관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나에게도 꾸준히 정치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에 대하여 기독교의 동참을 독려하는 문자를 보내는 후배가 하나 있다. 그런 문자를 받을 때 마다 나는 바울의 말씀을 생각해보곤 한다. “하나님이 지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라는 말씀을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세상이 아무리 잘못된 것 같아도, 다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 세상을 방치한 듯이, 아니면 아예 하나님이 무능한 하나님이라도 된 듯이 부르짖는 것이 과연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엄청 사람을 많이 죽이셨다. 성경에 나오는 기록들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노아의 홍수만 해도 다 쓸어버리신 하나님이시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실 그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고,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러워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그 목적하신 경륜 안에서 다 알아서 경영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 앞에서, ‘사람을 그렇게 죽여서야 하느냐?’, ‘그럼 인간의 존엄성이 어디에 있느냐?’, ‘저렇게 불의한 일이 일어나서 부녀자를 약탈하는 것이 옳으냐?’며 이것을 사람이 해결해야 한다고 나서자고 선동하는 것이다. 이는 방향성이 아주 잘못된 것이다. 한마디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주체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다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여한 목적을 이탈한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서 멈춰 버린 시계와 같이 죽은 것과 같은 존재들일 뿐이다.

 

그럼 사회적인 문제를 방관하는 것이 신앙이냐?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다 문제는 같은 것이다. 문제가 생긴 이유가 무엇인가? 전쟁이 났다면 그것은 일으킨 주체가 침공당한 나라를 볼 때, 자기는 선하고 저 나라는 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회적인 문제도 마찬가지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항상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 선하다고 여기는 것이 자신의 이익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문제는 뭔가가 옳다고 여기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절대로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거나 소란스럽게 한다거나 외치거나 하지 않는다. 뭔가가 옳다고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 문제를 일으켰는데, 그것에 대응하는 것도 동일하게 그것은 악하다고 하면서 대응하는 같은 싸움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볼 때, 이런 모든 동일한 싸움과 갈등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죽은 자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방향성이 틀어지고, 하나님께서 정한 존재의 자리를 벗어나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하여, 위대한 것을 추구하게 된 상태를 죄라고 한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들이 죄와 사망에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죄라는 것은 자기의 자리를 벗어난 상태를 말하는 하말티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서 보듯,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한 자리를 벗어나서 하나님처럼 위대해 지려고 하는 자리로 가버렸다는 것이다. 그 시작이 바로 선악과라는 것이고, 그렇게 자리를 벗어난 것은 고장 난 시계와 같이 생물학적으로 아무리 살아 있다고 해도 죽은 것이라는 말씀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 놓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람들이 범하는 살인이나 절도와 같은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게 하시려고 보내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위에서 말한 사람들의 죽은 상태에서 살려내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게 하고, 이 세상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서 교훈을 얻고 의미를 부여하여 서로에게 하나님의 목적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보여주셨다. 어떻게 보면 많은 병, 정말 불치의 병을 고치는 것 보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이 치유의 진정한 완성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치셨지만 결국은 그리스도라는 직임이 죽은 자를 살리는 직임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육신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죽은 자와 같은 사람들을 살리시는 직임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의도적인 퍼포먼스를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니까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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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죽음 (1)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3. 5. 2. 11:35 Writer : 김홍덕

모든 질병과 또 삶의 결국은 다 죽음이다. 이 세상에 이것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아무 것도 없다. 사람도 생명체도 그리고 제품들도 다 그러하다. 죽음이라는 것이 육신으로 보면 분명이 숨이 끊어지고, 호흡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죽음이라는 것은 의미를 상실하였을 때 그때가 바로 죽은 것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존재의 의미, 그것이 사라지만 비록 몸이 살아 있다 해도 죽은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시계는 시간을 가리켜 주어야 한다. 즉 주인에게 맞는 시간을 보여줄 수 있어야 시계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그것을 ‘죽었다’고 한다. 아무리 외형이 멀쩡해도 그 시계는 죽은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의미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보면 주인의 목적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것은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죽음이다.

 

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사망 가운데 있다고 했다. 그 말씀을 사람들이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숨쉬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상태인데, 성경은 사람이 그 말씀을 읽는 순간에도 그 사람은 죽은 사람과 같다는 것이다. 즉 육신이 멀쩡한데 성경은 사람들이 죽은 자들의 상태 곧 사망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죽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고장 난 시계와 같은 상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어진 목적을 버린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뿐 아니라 온 우주를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시려 하셨다. 사람은 어쩌면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표현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표현이라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어떠한가를 표현하는 존재이다. 이것은 죽음이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듯, 생긴 모습이 어떠한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만드셨다 했다. 정확히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고 하셨지만 그것이 이런 모양새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신데, 우리와 같은 모양을 가졌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는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사람은 세상에 있는 것에 비하면 아주 약하다. 모든 동물 중에서 태어나서 자립하기 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가장 길고, 유일하게 혼자서 출산하지 못하는 동물이며, 동물과 견주어서 이길 수 있는 것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 밖에 없다. 육신의 경쟁력은 사실 별로 없는 존재이다. 반면에 인간은 온 우주를 그 마음과 눈 안에 다 넣을 수 있고, 그것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의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가 있을 때,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짐승들을 아담에게 데려 오셔서 동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하게 하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 하시는 만물 중에 특별한 존재라는 의미를 가지는 말씀인 것이다. 또한 그것이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사람에게 주셨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춘수 시인도 이름을 불렀을 때 꽃이 되었다고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특성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시려는 본성이다.

 

사람이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어떠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관계는 어떤 공통성에 서로가 동의할 때 그때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 하실 때도 사람이라는 이름과 의미가 이미 부여된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과 하나님은 어떤 관계가 형성되었던 것이고, 그것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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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은 바위를 쪼개는 바람이나, 흙을 불사르는 불과 같은 초자연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그것을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은 이미 다 하나님께서 번개와 태풍과 또한 육체적으로 뛰어난 동물들을 만드심으로 다 표현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표현해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그것이 아니라 그런 것에 대한 의미 부여인 것이다. 마치 그 이름을 부르듯이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되려 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해서 하는 일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서 그 의미를 알고 부여해가는 것에 그 마음을 두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품성은 볼품 없는 것으로 여기고, 오히려 위대하고 강해지며 사람 안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욕망을 통제하는 것과 같은 마음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의 사건인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은 배고파서가 아니라, <하나님처럼 되려고>한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섭리의 방향이 전환되는 반역이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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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설 vs. 성악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 Date : 2013. 4. 30. 13:17 Writer : 김홍덕

어떻게 보면 기독교의 관점도 아니고 그렇게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이라는 것이 있다. 성선설은 맹자가, 성악설은 순자가 주장(?)한 이야기다. 그런 학자들이 이것이 성선설이다 성악설이다 이렇게 규정하진 않았지만, 내용 자체가 인간은 처음에는 선한데 세상에서 악하게 되었다는 것과, 태어나기를 악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배워서 선하게 되어야 한다는 일면 상반된 논리가 바로 성선설과 성악설이다.

 

 

교회 안에서 생각해보면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 에덴 동산에 처음 창조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가 범죄함으로 쫓겨났으니 성선설 같고, 또 아담을 제외하면 다른 모든 사람들은 성경에서 악하다고 하니 성악설인 것 같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이기도 하니 이는 어떻게 보면 순자의 논리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모든 논리가 다 사람의 행위에 기반을 둔 사상들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다. 즉 성선설이든, 성악설이든 여기서 말하는 선과 악은 사람의 행동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은 관심은 아닐지라도 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에 참여하게 되는 것 역시 사람의 선함과 악함이 그 행동양식에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사람의 행동에는 선한 것이 있고, 반대로 악한 것이 있는데, 그 양단 사이에서 볼 때 사람은 원래 선한 행동을 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하는 관점인 것이다. 그리고 교육과 같은 여러 가지  사회의 역량이 그런 사람들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주어 그 반대로 가게 하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성선설과 성악설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기독교적인 관점은 어떤 것인가? 아니 기독교가 아니라 성경적인 관점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자.

 

성경에서는 선악과라는 것이 나온다. 성경은 사람이 선악과를 먹어서 악한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악함만 먹은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을 같이 먹어서 악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이 선과 악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하는 그것 자체를 악함으로 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예수님을 보고 “선한 선생이여” 했을 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하셨다. 이것은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하여 선하다 악하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에 대한 정의는 하나님이 내리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선과 악은 하나님만이 정하신다는 의미인 것이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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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만 선과 악을 정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것은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그 주인이 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없으면 불가능한 믿음이다. 즉 사람의 눈에 아무리 선해 보여도 주인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나님만이 선과 악을 정하신다고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선과 악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주신 목적에 부합하면 선이고, 그렇지 않으면 악한 것이다. 이것은 사실 사람들의 일상에서도 같은 법이 적용되고 있다. 통화를 목적으로 산 전화기가 전화가 잘 안되면 악한 것이 되는 것처럼 사람들도 동일한 법 아래 살고 있다. 사람도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이다. 이렇듯 목적을 기준으로, 즉 그 존재의 목적을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이 성경의 법이다.

 

또한 성선설과 성악설의 근간이 되는 사람의 행동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살인도 전쟁과 평화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다른 사람에게 간음으로 보이는 알래스카인들의 행동도 우성 유전자를 종족에 유입시키려는 생존 본능이라 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선한지 악한지는 그 행동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에 맞는 삶을 사느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가늠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점, 성경의 관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선설이 되었던, 성악설이 되었던 사람의 행위 규범을 가지고 사람의 정체성을 논하는 모든 논리는 다 악한 것이다.

 

성경은 사람의 출생과 함께 그 존재가 선한지 악한지를 가늠하지 않는다. 모든 생명은 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라는 사명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그 가능성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목적 아래 살면 선한 존재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자신의 의(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를 좇아서 살면 악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구원을 베푸신 것이라는 말씀도 맞고, 또 모든 사람이 죄악 가운데 있다는 것도 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여 살 때에 온전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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