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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꽃과 같이(전자출판 교육을 받고)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4. 29. 13:42 Writer : 김홍덕

어제까지 3주간 토요일에 전자출판 실무과정이라는 교육을 받았다. 과정은 cocos2dx, Indesign, 그리고 Epub 이렇게 구성되어 있었다. 첫 번째 시간인 cocos2dx는 게임툴인데 이것으로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편성되었다고 한다. 강의를 들어보니 아이패드에 있는 어린이용 동화, 애니메이션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이었고, 두 번째 시간은 Indesign이라는 tool로 출판물을 만드는 것인데, 교회의 소식지나 잡지 같은 것을 만들 때 사용하는 프로그램인데, 이제 스마트폰, 아이패드 등에 있는 매거진을 만들 때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교육 받았고, 마지막으로는 전자책 format인 Epub에 대하여 공부했다.(블로그에 있는 글들을 전자책으로 출판하고 있어서 수강하게 되었다.)

 

전자출판수료증

 

강의를 들으면서 생각해보았다. 사실 프로그램을 가지고 문서나 출판물을 편집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거의 감각이다. 기술적인 어려움은 없다는 것이다. 출판물을 만드는 프로그램의 사용법은 몇 시간만 해보면 다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렵다. 왜 어려운가? 그것은 contents가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만들 프로그램이 없는 것이라기 보다, 만들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니, 이미 출판된 출판물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생겼다.(어쩌면 알고 있었던 것이지만) 어떤 출판물은 그것을 만드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 내용이 있다는 것이 대단한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대단해도 이렇게 배워서 출판물로 구성할 수 없으면 그 또한 허무한 것이다.

 

대학교 1학년 교양 국어과목의 한 학기 동안의 유일무이한 Report가 있었다. ‘도깨비’에 대하여 써 오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서관에서 다 찾아봐야 하는데 어디서 뭘 찾을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레포트의 분량은 달랑 3페이지였다. 그리고 수업 마지막 날 가보니 대부분의 학생들이 나와 비슷했다. 그런데 한 2~3명이 거의 논문 수준의 report를 내었다는 것이다. 그때 모든 학생들이 하나 같이 말하기를, 어디서 그 많은 내용을 찾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게 대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것 또한 정말 대단한 일이지만, 그것을 Report로 써서 내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인 것이다.

 

삶은 그런 것이다. 인생의 모든 것을 들여서 한 순간에 수렴시키는 것이다. 모든 꽃이 일년에 잠깐 몇 일 동안만 봉우리를 연다. 그것을 위해 일년을 보내는 것이다. 게다가 그 꽃 마저 목적이 아니다. 목적은 열매에 있다. 이것은 이때껏 내가 생각해온 삶에 대한 정의와 다른 것이다. 삶을 화려하게 누리며 살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전체 기간에 비해 절대적으로 작은 시간과 삶의 분량을 위해 모든 삶을 준비하듯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비효율적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가치의 문제이다. 꽃 피우기 위한 1년이라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길 것인가? 아니면 목적인 열매를 소중하게 여길 것인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효율에 관해서, 또 객관적인 가치 기준에 의하면, 몇 일 피우는 꽃을 위한 1년의 수고는 너무 어이 없는 것이지만, 목적을 가치로 여긴다면 1년 아니라 우담바라(Udumbara)처럼 3,000년도 좋은 것이다. 이것은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 하는 이야기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스데반의 삶도 참 대단한 삶이다. 내가 얼마나 은혜를 입어야 스데반 같이 살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삶의 지금 놓인 이 한 순간, 그리고 지금 내가 만날 수 있는 단 한 사람을 향하여 1년 간의 수고로움을 뒤로 하고 단 몇 일 피는 꽃을 피우듯, 이 한 순간, 이 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이 주신 순간에 감사하고,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전하는 것을 위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라는 것을 새겨보게 된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기 까지 지난 삶에 대한 작은 회상을 가져보기도 한다. 아직 좀 남긴 했지만 이제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기까지 짧은 삶을 살면서 겪은 모든 일들이 아무리 대단했다 해도(사실 별거 없지만…) 그것이 꽃을 피우듯 목적에 수렴할 수 없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이 인생의 존재 이유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치를 깨달아서 이르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가치를 두는가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알 때, 삶의 모든 시간과 성과와 교훈과 깨달음, 그 모든 것을 발견한 가치에 수렴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삶의 모든 구성 요소 또한 의미 있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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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장에 대한 새로운 묵상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4. 29. 09:58 Writer : 김홍덕

수 많은 자동차 부품들이 생산된다. 그것들은 매우 엄격한 기준에 의하여 설계되고 생산되고 검사되어 제품이 된다. 가공되는 과정도 만만하지 않다. 어떤 것은 엄청난 고열에서 녹여진 다음에 모양을 갖추게 되고 어떤 것은 또 아주 빠르고 날카로운 바이트(칼)에 의하여 깎여서 제품이 된다. 그래서 그 하나 하나의 가치는 때로는 아주 높기도 하다. 하지만 그 어떤 자동차 부품도 자동차에 결합되지 못하면 그저 가능성만 남긴 체 별다른 가치를 가지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동차 부품은 자동차 부품이기 때문이다. 자동차에 결합될 목적으로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경륜을 받는 것도 그러하다. 어떤 사람은 아주 가난한 조건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이르고, 또 어떤 사람은  반대로 부유한 환경에서 그렇게 되기도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은 어려서부터 험한 일을 많이 겪으면서 신앙이 자라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좋은 부모 밑에서 안정된 생활 중에 신앙이 자라기도 한다. 그런 것을 보면서 먼저는 “Ego Eimi”라는 것을 생각해보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맞게 경륜을 하신다는 것이다. Ego Eimi는 ‘나는 나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신앙 안에서 경륜의 과정을 거쳐갈 때, 특히 곤고한 삶을 살아보면 “왜 내게 이런 일이?”라던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도무지 무슨 계획을 가지고 계시길래 내게 이렇게 하시는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경륜 안에서 열심히 살다 보면 그 과정 과정에서 충분한 열매를 맺고, 또 그 안에서 교훈을 받아서 신앙이 자라난다. 하지만 그 안에서 끊임없는 의문이 있는데 그것은 “이렇게 훈련만 하고 마는 것인가?’와 같은 의문, 다르게 표현하면 “언제까지 이렇게 연단만 받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내 자신과 남들이 나의 경륜의 과정을 보며 교훈을 얻는 것은 좋은데 정작 나는 무엇을 얻는가? 하는 의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신앙 안에서 참 곤고한 중에 탄식 같은 의문이다.(그러나 자기 육신의 삶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신앙으로 아는 이들에게는 무관한 일이다.) 나 역시도 행위로 의롭게 되는 Do와 Have의 신앙을 떠나면서부터 지금껏 해결하지 못한 의문이 이것이었다. 그리고 객관적 기준에 의하면 별거 아닌 것 같은 삶일지는 몰라도, 나로서는 힘든 과정들을 겪고서 이제 돌아보니, 그 모든 것은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려진 것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러한 세계에 대하여 <비밀>이라고 하셨다.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내가 창조된 목적에 앞서 있는 나의 가치였다. 그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운동에서 경기를 이기려 하는 것이 아니라, 화려한 기술을 보이려고 하는 것과 같은 모양인 것이다.

 

모든 인생의 가치는 목적이 이루어졌을 때, 그때 가치가 부여된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목적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 세계에 대하여 눈을 뜨고, 그 세계의 창세기가 시작되었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 모은 인생의 삶은 서로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요한일서에서 요한 사도는 <사랑>이라고 했다. 즉, 사람에게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했다. 하나님을 아는 것, 알게 해 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목적이다. 그것이 자동차 부품에게 있어 자동차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기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런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라고 했다. 이것은 한마디로 내가 하나님을 나타내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에 사용되지 못하면, 자동차 부품이 자동차 안에 결합되지 아니한 것과 같이 별다른 소용이 없다는 말씀인 것이다. 신앙 안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고, 어떤 힘든 과정을 거쳐서 그 안에서 교훈을 얻어 간다 해도 그것을 복음을 전하는 것에 수렴시키지 못한다면 그 과정에서 어떤 교훈을 깨달았다고 해도, 또 어떤 승리가 있다 해도 그것은 자동차 부품이 단품으로서 가지는 가치는 있을지 모르지만 사랑을 아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것은 개인으로서의 가치를 공동체의 가치로 삶의 가치를 재조정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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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하나님 안에서 살아오는 동안, 내가 복음을 전하고, 또 그 사람이 복음을 전하고, 그렇게 전하고 전하고 한다면 최종 유저(User)는 누구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다면 나에게는 어떤 유익이 있고,  복음은 전하기만 하고 결과는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새롭게 묵상해보는 사랑장에서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하는 말씀의 반대편을 보니, 무엇을 가치로 여길 것인지에 대한 새 세계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삶의 안착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도 본능처럼 알게 된다. 삶의 한절 한절 안에도 어떻게 보면 처절한 정도의 경륜이 있겠으나, 그것이 무엇이라도 하나님을 전하는 사랑이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안식할 수 없는 삶의 과정이요, 목적이 없는 삶이고, 끝 없는 의문에 쌓인 삶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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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중풍병자의 치유 (3)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3. 4. 26. 14:28 Writer : 김홍덕

성경은 행위 규범이 아니다. 생명의 말씀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어떤 행동을 한다고 그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개그맨이 개와 같이 행동한다고 해서 개가 되는 것이 아니듯, 생명이라는 것은 어떤 행동을 신념과 의지로서 따라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 말씀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이 있으면 그 모든 것을 다 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천하에 둘도 없는 개그맨이 개 흉내를 내는 것 보다, 개로 태어난 강아지들은 그냥 개로 사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 표현이 어떤 행위 규범과 같이 표현되었더라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생명으로 나기만 하면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가?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기만 하면 모든 말씀이 자기의 삶이 되는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성경을 생명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행위 규범으로 보면서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여기고 가르치며 배우고 노력하는 그 모든 가치관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게 막고 있는 바리새인과 같은 가치관이요 안목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어떤 행동을 함으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여긴다. 게다가 그것을 교회가 가르치고 있다. 그런 가치관은 예수님을 만나게 할 수 없고 오히려 바리새인과 같이 방해가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런 행위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기준에 의거하여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행위로서 유대인들을 많이 화나게 한 분이다. 유대인들이 정한 행위 규범을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못 박히셨는데, 그 예수님께서 행위로 공로로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과 만나 주시겠는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영적인 중풍병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중풍병자가 치유가 된다는 것은 그러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삶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마치 사람의 생각이 정상적으로 몸으로 표현되듯이 말이다. 중풍병자가 그렇게 되면 그것이 바로 치유인 것이다. 그래서 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은 지붕을 뜯어내고 그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게 한 것이다. 지붕은 하늘을 가리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바리새인과 같은 생각이다. 지붕이 하늘을 가려 하늘의 뜻인 비가 땅에 이루어지지 않게 하듯, 바리새인들과 같이 행함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하는 생각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게 가리는 것이기에, 그것을 뜯어내고 병자를 예수님과 만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들이 지붕을 뜯어내었을 때, 그 때 이미 그 병자의 병은 치유 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게 지붕을 뜯어내서라도 예수님을 만나야겠다는 것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과 같은 가치관에 가려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채 계속 하나님의 뜻이 내 삶이 되지 못하는 중풍병자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들은 지붕을 뜯어내고서 예수님을 만나려 한 것이다. 그들의 그런 생각이 이미 중풍을 이긴 것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생각을 벗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피라미드와 같이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위로 위로 갈수록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천하고 낮은 죄인의 자리인 십자가의 자리로 가신 예수님을 만나려고 한 것이다. 그것은 또한 진정한 죄 사함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다’ 하심으로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자신의 자리를 인정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를 인정한다는 것이기에 그것은 당연히 죄를 사함 받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중풍병자가 만나려 한 예수님은 위대해지고 세상에서 성공할수록 인정받는 그런 가치관 속의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의 자리로 가신 예수님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 십자가의 자리에 있는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 예수님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원래의 자리인 것이다. 그 자리를 수용한다는 것이 바로 머리의 생각을 몸이 받드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에 내가 순종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벌거벗겨졌고, 손과 발에 못 박혔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셨고, 그 신분은 죄인인 자리였다. 그것이 오늘 나의 모습이라고 인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이 행동으로 전달이 되듯 십자가가 나에게 나의 자리로 인정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그 사람에게 중풍병자와는 다르게 잘 전달이 되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 바로 중풍병자가 치유되는 것이다.


중풍은 머리의 생각을 몸이 받들지 못하는 병이다. 영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는 상태가 그것과 같다. 그리고 그 상태를 성경은 죄라고 한다. 그러므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서 고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두신 그 뜻과 목적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서 마치 머리의 생각을 몸이 받들듯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이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사람의 죄가 용서 받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것을 위하여 오신 분이라는 것을 보이심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서로에게 있어 서로의 죄를 사하여 주는 것에 이르러야 한다. 이는 주기도문에서도 말씀하신 것이다. 가버나움의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예수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심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참람’하다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마음을 아시고 이르시기를 “어찌하여 마음에 악(惡)한 생각을 하느냐?”(마 9:4)라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마 9:6) 하시었다. 여기에 나오는 인자는 바로 사람의 아들 인자(人子)이다. 즉 사람이다.


즉 이는 사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모든 행동으로 범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말씀이 아니다. 중풍 병이 고침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그 사람의 생각과 삶에 정상적으로 반영되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임을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그 모습이 연약하고 때로 세상적인 규범에 대하여 죄도 범하고 종교적인 계율도 지키지 못하는 상태 그 자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감히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 잘못 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의 모습이 초라하고 볼품없고 연약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상태를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는데 사람이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고치려 하여 잠도 안자고, 욕망도 제어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람은 원래 그렇다. 그것을 인정하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죄를 부여하는 것은 오직 그것 하나가 안 되어서 그런 것이다. 즉 사람이 연약하다는 것, 그 연약함을 가진 상태로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것,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는 사람의 모습을 자기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 때문에 사람이 서로를 죄인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만 없어진다면 사람의 죄를 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가신 이유가 바로 그런 연약함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계율을 지키지 못하고 세금도 안내는 등 세상으로 온 기준과 법과 규례를 어기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가 다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은 그럴 수 없게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영적인 중풍이 고침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죄를 사함 받았다는 것이고, 그렇게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은 자신도 다른 사람을 볼 때 세상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니 죄를 물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서로 죄를 사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말씀하시고,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함을 보여 주시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죄를 사한다고 하는 것을 참람하다고 하는 것은 그들은 세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늘 판단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생각이야 말로 악(惡)한 생각이라고 하셨다. 악이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다고 여기는 그것이 바로 악한 생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사람을 볼 때 자기가 가진 세상적인 가치기준으로 판단하고 심판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에서 죄를 면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마저 그 심판으로 죄인이 되셨는데, 하물며 우리겠는가? 그러나 그 예수님께서 그렇게 심판을 받으셨다는 것은 우리도 늘 그런 심판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이고,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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