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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부활 (1)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3. 5. 9. 10:23 Writer : 김홍덕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부활이라고들 한다. 물론 그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 근원에 대하여 더 분명히 할 때 진정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근원이라는 것은 어떤 생명이 어떤 죽음을 당했을 때 그때 부활이 있다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다시 살리시는 사건을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생명과 자신의 생명이 같다고 여기겠지만 말 같이 쉬운 이야기는 아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 예수님의 생명과 자신의 생명이 같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안다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도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더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가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아니었듯이 말이다. 마치 TV에 나오는 연예인은 나를 모르는데 내가 TV에서 봤다고 안다고 하듯이 예수님을 안다고 해서 예수님의 생명과 자신의 생명이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예수님을 아는 것도 아니다. 


특정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죽음을 당했느냐 하는 문제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사람들이 말하는 범죄, 살인이나 절도와 같은 죄로 인함이 아니시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어떤 정체성에 대하여 세상의 사람들과 하나님의 기준이 다른 것에서 비롯된 죽음이다. 당시의 유대인들 역시 어떤 분인지 본 적은 없지만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그 메시야가 어떤 분인가 하는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메시야는 곧 그리스도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메시야가 오시면 로마의 속국으로 있는 정치적 상황과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획기적인 능력을 보여주실 분이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먹고 사는 문제와 정치와 같은 세상의 일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능력을 가지고 그러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보내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 이제 굶어 죽지 않겠구나 열광했고, 병자들을 고칠 때 열광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이제 로마는 끝장 날것이라는 기대로 환호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초라한 모습으로 자신이 메시야라고 말씀하시니 그것은 이때껏 메시야에 대하여 온갖 노력과 공의로 쌓은 자리에서 그렇게 사람들에게 가르쳐온 제사장과 유대인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많던 기적과 치유와 능력은 어디에 가고 초라하게 십자가로 끌려가셔서 죽임을 당하시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즉, 세상에서 능력을 쌓고, 율법의 규례를 지켜 행하려 노력하고, 예의 바르고, 공로가 있어야 메시야가 될 수 있다는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어 처형되신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들이 그렇게 기대했던 예수가 힘 한번 못써보고 잡혀가서 심문을 받고 십자가에 달리게 되었으니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실망을 넘어선 배신감이 예수님이 아닌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외치기도 한 것이었다. 게다가 일반 군중뿐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그 마음 깊이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와서 ‘하나는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청탁하는 일반 군중들과 같은 마음이 드러나서 모두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을 갔던 것이다. 그래서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을 보려고 찾아간 베드로가 부인하기를 예수님이 누군지 모르겠다고 부인한 것이다. 즉, 자기의 마음속에 기대했던 예수는 어디 가고, 저렇게 매 맞고 있는 예수만 남았나 하는 마음으로 보니 매 맞고 있는 예수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한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 번 부인할 것은 예언하신 것은 베드로의 행위를 예언하신 것이지만, 실재로는 베드로의 마음 안에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일련의 과정은 예수님께서 어떠한 죽음을 당하셨고, 왜 하나님께서 그 죽음에 대하여 다시 살리셨는지에 대한 비밀이 이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죽임을 당하셨기에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죽인 세상의 가치관이라는 것은 근원적으로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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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2:16-17 몸과 그림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3. 5. 7. 15:44 Writer : 김홍덕

세상은 모든 것이 형식과 내용으로 되어 있다고 했다. 이것은 어느 것에도 예외가 없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이 그러하다. 이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내용이신 하나님, 의를 가지신 하나님이 영으로 계시고 그 성품을 세상을 통해 표현하셨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은 그 법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 특히나 사람이 만든 것은 다 그렇게 구성이 되어 있다.


자동차가 있다면, 자동차의 내용이 있다. 자동차의 내용은 다른 것이 아니다. 존재의 이유이고 존재의 목적인 운송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자동차가 자동차의 전부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자동차의 실체는 이동이나 운송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으로 보고, 또한 그 안에 앉을 수 있는 물체로서의 자동차가 자동차가 아니라, 이동하는 것이 자동차의 본질이고 내용이라는 것이다.





특히나 종교의 세계 안에는 이것이 더욱 중요하다. 제사를 예로 들면 제사의 절차나 예식이나 기물이 본질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목적과 그 제사를 드리는 사람에게 있는 제사를 드리는 이유가 제사의 본질인 것이다. 이것을 간과하면 신앙이 형식적이고 율법적인 신앙이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는 그 규례가 본질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목적이 있는데 그것이 진정한 목적이고 실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에게서 부터 지금의 많은 교회들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법을 알지 못한 체 신앙생활을 하고 또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상당한 한계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화려해지고 있는 것 역시 이러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 연유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나님께서 성전의 각종 규례를 정하신 것은 결국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 자체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과 같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거하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성전의 규례와 같이 사람이 경륜을 거쳐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규례를 주신 것이지, 성전의 모양을 규례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지금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도 이러한 문제가 있었다. 골로새 교회에 세상의 자연과학과 철학이 들어오기도 했고, 또한 육신을 부인하는 즉 육신은 거저 부정할 뿐이라 주장하는 영지주의도 있었지만, 또한 당시의 교회들의 시작 대부분이 아시아 각지에 흩어진 유대인들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율법이 정한 규례를 지키는 것이 신앙의 모습이라는 주장 또한 항상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서 바울 사도는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평론하지 못하게 하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각종 종교적인 예식을 지켜야만 된다고 교회에서 주장하는 것에 관하여 경계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은 다 그림자와 같다는 것이다. 


그림자는 본체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절기를 지키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절기를 주신 이유를 아는 것이 그림자가 아닌 몸체를 아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주셔서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지키는 모든 규례들이 다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스도가 그림자의 본체라는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교회들도 매우 주의 깊게 봐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요, 또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규례와 절기와 월삭과 안식을 지키는 모든 것은 그것을 지키는 것이 본질도 아니고 그것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신앙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것에는 목적이 있으니 그 목적을 아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이다. 


신앙이 그런 것이다. 십일조를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의 예표로 드리는 것이 십일조이고, 기도를 함으로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목적이자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의 모든 말과 소망이 기도가 되는 것이다. 절기도 절기를 지킴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지키는 것이 절기라는 의미니, 그것이 그림자가 실존이 아니라 몸이 실존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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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죽음 (3)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3. 5. 6. 11:30 Writer : 김홍덕

성경의 기록으로 본다면 예수님께서 살리신 죽은 사람은 3명이다. 야이로의 딸(마 9장, 막 5장, 눅 8장), 나인성 과부의 아들(눅 7장), 그리고 나사로 (요 11장)이렇게 3명이다. 물론 각각의 사건들 안에도 많은 하나님의 교훈을 살펴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것은, 그 직임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은 사람들을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심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사람을 살리셨는가? 사람들이 왜 하나님 앞에서 죽은 상태인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자리와 목적을 이탈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이며, 하나님과 사람은 어떠한 관계인가 하는 것을 회복시켜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다시 살아나는 길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모든 생애는 십자가와 부활에 집약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이고, 죽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곳이며,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회복되는 자리인 것이다.

 

사람들은 선악과를 먹은 이후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보며, 이것이 옳다 저것이 악하다 판단하면서 살게 되었다. 그런 세상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셨는데, 사람들이 보니 한마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기에는 영 어설픈 인생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세상에서 위대하고 고상하고 예의 바르고 반듯하며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키면 지킬수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나라에서도 알아주는 가난한 동네인 나사렛에 사는 목수의 아들이 나타나서는 안식일도 맘대로 범하고, 성전에서는 상을 엎어 버리고, 가는 곳 마다 스스로를 거룩하게 여기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할 뿐 아니라, 세금도 잘 내지 않는 아주 형편없는 행태를 보이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자기를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는 소리를 하니 그들이 볼 때는 어이없는 개소리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 어이없는 말들이 자신의 하나님을 모욕한다 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여 버린 것이다.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가 하면, 예수님을 못 박은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의 생각은 선악과를 먹고 난 다음의 아담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기 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예수님의 모든 것은, 마치 아담이 스스로가 벗은 것을 정죄하여 무화과로 몸을 가리듯이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볼 때 예수님의 모습은 부끄러운 모습이고, 사람이 저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여 버린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달리시게 된 이유이고 죄목인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모습이 악하다고 해서 처형했지만, 예수님의 모습은 원래 하나님께서 만드신 선악과를 먹기 전의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이다. 마치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그 전부터 벌거벗고 있었던 자신을 정죄함과 같이……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와 그 모습을 자세히 보고 그 모습이 나의 모습과 같다고 여겨진다면, 그것이 내 모습이라고 하나님 앞에 고백한다면 나의 정체성도 하나님 앞에서 선악과를 먹기 전의 모습,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어떤 선악의 기준을 들이대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기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저게 바로 나의 모습이다!”> 인정이 되면, 하나님과의 방향성과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존재의 목적이 회복되어 수리된 시계와 같이 죽음 가운데서 구원을 얻게 되는 그것이 바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의 권능인 것이다.

 

그리고 나와 같은 모습이라는 것이 인정이 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신분이 무엇인가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의 모습이라고 인정이 된다는 것은 곧 그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신 분이신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형상이 없으신 하나님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어떤 이 안에 있는 보이지 않던 것이 형상화 된 존재를 우리가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는 것, 즉 하나님 어떤 분이신지 표현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본연의 관계성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라는 것은 위대하지도 않고, 추악한 죄인의 틀에 박힌 죄인의 모습인데, 그것이 어떻게 나의 모습일까 생각해보면 금방은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아도,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예수님을 못 박은 법을 보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가 연약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스스로를 늘 단련하려 한다. 하지만 나를 단련해야만 제대로 된 것이라는 법 앞에서 우리는 늘 죄인이다.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간음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모세는 간음하지 말라 했는데,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다 간음한 것이라고 하시고, 살인에 관해서는 사람을 보고 욕을 하면 이미 살인한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즉 사람이 자신을 다스려서 간음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거나 살인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그 마음 안에 음욕과 살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게 인간의 본성인데, 그것을 제어하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고 싶은 것이다. 즉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마음 때문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유이다.

 

창세기 11장에는 바벨탑에 대한 말씀이 있다. 사람들이 이르기를 우리가 하늘까지 탑을 쌓아서 하나님께 이르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벽돌을 만들었다고 했다.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굽자는 것은 사람을 단련하자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흙은 사람이다. 그 흙을 벽돌로 만들었다는 것은 가공한다는 것이고, 불에 굽자는 것은 단련시키자는 것이다. 즉 사람 안에 연약함을 없애고 그것을 쌓고 모아서 하늘에 이르자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관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이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 예수님을 심판한 그 법 앞에 서면 다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어떤 분야에서 노력해도 1등이 되기 어렵다. 1등이 싶어 위를 보면 또 위에 누군가가 있다. 늘 옥상 옥인 것이다. 그러다 설사 1등이 된다 해도 곧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1등이 뭔가, 그 아래의 모든 등수에 있는 사람을 이겨서 죄인을 만든 자리가 1등인 것이다. 도덕에 관해서도, 재물에 관해서도, 공부에 관해서도 가도가도 끝이 없고, 끝에 이르지 않은 모든 인생은 다 1등이 되는 법 앞에서 죄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심판한 법 앞에서는 언제나 죄인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못 박은 사람들의 법 앞에서 죄인이 되시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사람들도 이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한 것이다. ‘종교적인 규례를 잘 지켜야 하나님의 아들이지’라는 가치관 앞에 서면 누구나 죄인이 된다. 우린 누구도 성경에 나오는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 모든 것을 지키다가 하나를 어기면 모든 것을 어기는 것이라는 것을 문둥병에 관한 성경을 통하여 확인했다. 또한 세상적으로 성공해야 왕이 될 수 있다는 가치관 앞에서도 우리는 늘 죄인이다. 누가 어느 곳에 종사한다 해도 언제나 위에 누군가가 있고, 또 항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또한 우리가 그렇게는 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태초로부터, 이 땅에 예수님께서 사람이 보는 형태로 오는 날까지의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 자신이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요 적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심판 받으신 그 법 앞에서 다 죄인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이것이 너의 모습이다 하시는 것 안에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심판 받으신 그 법대로 심판 받는 존재이지만, 그것을 인정할 때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예수님과 동일한 존재라는 것이 발견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존재 목적이 회복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말 자체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직임이고, 또한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서 죽은 상태에 있었는데,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것이 발견됨으로써 나도 살아나는 존재가 되는 완전한 치유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이 바로 나의 사건과 나의 삶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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