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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육신으로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이유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왜 그러한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꾸 육신을 제어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우기는 것이고, 그러다가 영지주의나 천사 숭배로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이 어떠하기에 그 모습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육신의 모습이라는 말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신성 모독과 반역죄 때문이다.


그것은 보잘 것 없는 모양을 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보잘것없어 보였던 것은 지금으로 보면 세상에서 성공하지도 못했고 오히려 창녀나 매국노 급의 세리 등의 죄인들과 놀았기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은 예수님을 아주 경건한 분으로 섬긴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의 법 안에서 보면 온전하신 분이지만, 그 당시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볼 때는 아주 이상한 사람이었다. 신비한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사회에서 외면을 넘어 터부시 하는 계층과 놀고 그것도 모자라 유대인의 계율도 이런 저런 이유로 잘 지키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세금도 잘 내지 않고, 법도 잘 지키지 않고, 창녀들, 범죄자들과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해방신학자라는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보이신 이런 모습을 보고 민중운동 혹은 사회운동으로 수렴시키는데 그것은 본질을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런 모습들을 보이셨던 것은 사회 운동이나 유대인들을 자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육신의 모습 그대로를 보이시기 위함이고, 또 육신을 제어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볼 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오히려 하나님이 보실 때 더 긍휼한 마음을 자아내는 것이기에 그렇게 하셨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종교적인 규례를 매번 어기다시피 하고 또 나라 법도 잘 안 지키면서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또 정치적으로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시니 이것이야 말로 웃기는 일이고, 종교지도자나 정치가들이 볼 때 터무니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 되겠다 싶은 나머지 잡아서 죽이려고 십자가에서 처형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지경이 되어도 그렇게 많이 일으키던 기적을 일으켜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고 그냥 죽으셨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세상적인인 규례와 법 앞에 섰을 때 죄인이 되는 그런 육신을 가진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육신을 창조하신 그대로의 모습이고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모습이라야 하나님이 거하셔서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겠다고 하는 것은 이 육신의 삶은 형식이고 하나님은 내용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와 뜻이 사람을 통하여 표현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육신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성이 거하는 사람의 육신, 아니 사람의 정체성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우리의 육신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하셨고, 우리 몸을 거룩한 사나 제사로 드리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법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씀, 하나님의 신성이 거한다는 것이나 산제사, 또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과 같은 말씀을 오해한다. 이런 말씀을 오해하면 이단이 되는 것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으로서 육신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모르면 이단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성이 사람 안에 거하는 것은 사람을 신비롭고 신령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구원이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에서 벗어나고 이것을 왜곡하면 사도들이 경계한 이단이나 예수님을 못 박은 유대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모든 신성이 충만하다고 선언하고, 우리도 그 그리스도의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신성으로 충만하여졌다고 권면하고 있으며, 이 모든 충만에 관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가 되신다고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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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육신은 아주 연약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아주 강하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보면 대부분의 종교가 이 육신을 부인하는 것에 종교적인 초점을 상당히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나 천주교의 경우 진정한 구도자가 되기 위해 성욕을 억제하여야 한다 하여 결혼을 하지 않는 계층이 있고, 기독교의 경우도 인간의 육신이 가진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 신앙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금식이라든가 철야기도를 수 없이 하고 있다.


골로새교회에 바울 사도가 편지를 보내는 당시의 시대에도 천사 숭배 사상이나, 육신은 부정하고 영만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영지주의와 같은 사상들도 다 육신 안에서 나오는 욕망과 또 사람들이 육신을 가지고 보여주는 연약하고 부정한 모습을 신앙 안에서 버려야 할 것으로 간주하는 생각, 즉 육신은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 사상들의 근간인 것이다. 그리고 이 생각은 사람들이 쉽게 동의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육신이 거의 동일한 욕망과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육신의 부정적인 모습에 시각을 제한 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육신을 누가 조성하셨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가 거하는 그 육신을 스스로 부정하게 여기지만 그 육신을 자기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자신이 조성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부모도 물론 아니다. 그렇다면 이 육신을 누가 조성하였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조성하고 창조하신 것이다.(진화론에 대하여 논하고 싶지만 다음 기회로 미룬다.)


누군가가 스마트폰을 구입해서 기능이 불량하면 그 스마트폰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만든 제조사를 욕한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부정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이다. 사람들이 육신을 부정하게 여기는 이유는 하나님과 사람이 육신을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인 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그것이 가장 큰 죄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것에 대하여 사람이 잘됐다 아니다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것을 선악과를 먹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바울 사도의 안목 안에는 온 세상 만물이 다 그리스도를 향하고 위한 것이라는 것과 또 사람의 육신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선언이다. 많은 종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육신을 제어하고, 육신을 부정하다 여기고 그것을 이기려고 하는 것에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고 반항이고 죄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을 이렇게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아담과 우리가 다른 육신을 가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진짜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을 스스로가 부정하게 여길 만큼 약하게 만드신 것에는 이유가 있으시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이유를 기준으로 우리 육신을 볼 때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액션 영화에 나오는 유리가 깨어지는 장면을 위해서는 설탕으로 유리를 만든다고도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잘 깨어지라고 그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유리를 만든 사람은 유리가 잘 깨어질 때 보기에 좋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위하여 만드신 것이다.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좁아터진 사람의 마음 안에 공간적으로 거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으로 살게 하시기 위하여 만드셨다는 것이다. 


마치 유전자가 남자면 남자로 살고, 유전자가 여자면 여자로 사는 것처럼 우리 삶의 유전자와 같이 거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표현하면서 살아가게 할 목적으로 만드셨고, 그 목적으로 볼 때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육신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개를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면 개의 모습으로 오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신을 가진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의 육신이 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합당한 것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 모습이 바로 십자가의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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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교회는 모르는 주기도문

Category : 출간 서적 소개 Date : 2013. 4. 2. 09:47 Writer : 김홍덕

 

생각해보면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관하여 크게 열심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공부해야 하는 학창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고, 직장에서 남 보다 정말 열심히 해서 뭔가 이루어 보겠다는 것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다행히도 각 시절에는 적당한 그리고 때로는 성공적인 기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물론 실패한 것도 많았지만…… 그런데 단 한가지 예수 믿는 일에 대하여는 참 열심이었던 것 같다. 물론 많은 기간을 그저 열심이만 했었지만 말이다. 옛말로 국민학교에 들어간 이후 지금까지의 기간 중에 지금으로부터 지난 한 20년 정도는 방향은 제대로 잡았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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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20년간 신앙에 대하여 묵상하고, 또 보고 배우고 실패하고 돌이키고 한 것을 책으로 내어 보기로 했다. 시대에 맞추어 전자책으로 발간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첫 작품을 지난 달에 발간했다. 제목은 <큰 교회는 모르는 주기도문>이라고 했다. 언뜻 보면 도발적인 느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큰 교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알면 좀 누그러뜨려질 것이라 생각된다.

 

내가 말하는 큰 교회는 이 블로그를 통해서 계속 말하고 있는 교회를 말한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세상적인 것이 있으면 더 좋다는 것을 가르치는 모든 교회를 크기에 관계 없이 나는 <큰 교회>라고 정의를 한 것이다. 이를테면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라고 가르치는 교회들 말이다. 학생에겐 공부 잘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 가르치고, 사업하는 사람에게는 사업이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 가르치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 전하면 되는 곳인데 그런 세상의 성공을 가르친다는 것은 변질이다. 그리고 그런 교회는 하나 같이 외형의 발전을 교회의 발전이라 여긴다.

 

나의 신앙관도 그러했다. 복음이란 것이 ‘모태신앙이면 더 좋다’라던가, 아니면 남자라는 것을 강조하기도 하고, ‘군에 가보지 않으면 모른다’와 같은 것이 신앙과 접목되어 있었다. 그런 것을 떨쳐 내는데 10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 그 잔재들을 정리해 가고 있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런 시점에, 거의 20년 전에 새롭게 들었던 <주기도문>에 대하여 지난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듣고 보고 또 내가 실패하고 돌이키며 배운 것을 주기도문에 실어 책으로 발간해 보았다.

 

다시 읽어보니 맞춤법이 틀린 곳도 많고, 내용이 매끄럽지 못한 것도 많다. 더욱이 독자의 입장이 크게 고려되지 않고, 내가 보는 각도에 가깝다는 점도 보여 참 허술하다. 하지만 이제 이렇게라도 복음에 대하여 전하려고 한다. 또 계속 책을 쓸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전에는 페이스북이나, 카페 같은 곳에 늘 웃긴 사진이나 올리며 살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이제 그것을 금할 이유는 없지만 이제는 많은 지면과 시간을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활용하면서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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