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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그 위대한 변신 유전자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4. 2. 00:25 Writer : 김홍덕

나는 경상도 남자다. 그러니까 제대로 하는 것도 없으면서 '남자네'하는 고리타분한 경상도 남자라는 이야기다. 결혼 초기에만 해도 아내가 아들을 미장원에 데리고 갔다는 이유만으로 화를 내기도 했었는데, 이젠 가끔씩 미장원에 가서 파머도 해 보고 그런다. 그게 내 사고방식이 완전히 바뀐 것이라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전과는 많이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 내가 여자를 볼 때 아주 놀라운 점이 있다. 계속 생각이 나서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된 것인데, 남자들에 비해 자기의 삶이 크게 바뀌는 것을 잘 수용한다는 것이다. 특히 결혼이라는 것은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준다. 여자들은 결혼을 하면 자기가 살아온 문화가 바뀐다. 그런 엄청난 변화를 크게 고려하지 않고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목적을 향해 직진하는 모습과 같은 것이다.



특히나 여자가 아이를 낳고 나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다. 사는 세계가 달라지는 것이다.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는 상황이지만, 내가 고등학생이던 80년대 초만 해도 시내 버스 안에서 아이에게 수유하는 엄마들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처녀들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이지만, 아이를 낳은 여자, 즉 엄마들은 아이의 일이라면 가슴을 보이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여자는 살아가는 세계가 바뀌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 위대한 변신이다.



<사진 출처 : http://www.khanews.com/ 효성병원의 제4회 모유 사진전 대상 수상작>



사람은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는 여자와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우리를 예수님 앞에서 신부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여자는 아이를 낳음으로 세계가 바뀌는 존재이다. 하나님 앞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새로운 존재가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우선은 자기 자신이 거듭남으로 완전히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이 여자와 같은 것이고, 또 복음을 전파하여 얻은 생명이 또 아들과 같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아이를 위하여 사는 존재는 모든 것이 다 아이에게 집중이 되고 아이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은 존재가 되는 것이 바로 여자다. 그와 같이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기에 하나님의 생명으로 낳은 아들, 바울에게서 디모데와 같은 아들, 즉 말씀을 전하여 그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된 그 생명을 위하여 모든 것을 올인하는 삶을 사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사람인 것이다.



생각해보니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목적만을 위하여 사는 것이 참 어렵게 여기면서만 살아왔던 것 같다. 하지만 여자들을 보며, 아니 엄마들을 보며 하나님 앞에서 나의 정체성도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목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내 안에 유전자로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 간다. 즉, 아이를 낳은 여자들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어떤 수치도 위험도 개념치 않고 아이를 위해서 살아가는 분명한 세계관을 가지게 되듯, 나 또한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존재로서 그렇게 아들과 같은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것에, 또 아들을 위하여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살기에 충분한 유전자를 이미 가지고 있음을 확신해 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흩어져 있는 미완인 삶의 조각을 하나로 완성하고, 아이를 낳고 변신한 여자와 같이 완전히 세계가 바뀐 삶으로 가는 것이라 여긴다. 이 세계는 태초에 초대받은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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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가 말하는 헛된 속임수라는 것은 결국 속았을 때,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좇는 것은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교회나 개인의 신앙이 세상의 가치관을 혼용하여 그러한 것이 더해질수록 신앙이 좋은 것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것은 앞에서도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아무 것도 없고 오히려 죄인으로 죽어가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이셨는데, 개인의 신앙이나 교회가 더 가질수록 좋은 신앙이고, 외형이 화려해질수록 또 커질수록 발전했다고 여기는 것이 얼마나 변질된 것인가?


그리고 기왕이면 뭔가 더해지면 좋은 것이 아니냐? 는 관점이 가진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기 때문(골 2:9)이라고 바울 사도는 말씀하고 있는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는 세상의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인데, 그것을 그리스도와 합하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앞(이전 포스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만물이 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나무도 되고 강도 되고 산도 되고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온전한 것이 나오면 다른 것은 물리는 것이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밝은 대낮에 불을 켜야 온전하다고 태양 아래에 형광등을 켜면 어떻게 되겠는가? 계속 그러고 있으면 아마 정신병원의 치료를 받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즉 세상의 철학이나, 돈이나 명예나, 학력과 같은 모든 것이 왜 있느냐 하면 그것은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이 나오게 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표현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 형식이라고 했다. 형식은 어떤 내용의 표현인 것이다. 내용이 온전해지면 형식은 버리는 것이다. 분필이 왜 있는가 하면, 학생에게 지식이 전달되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생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분필은 없어지는 것이다. 목적은 학생에게 선생님이 가진 지식이 전해지는 것이니 그것이 되면 다른 모든 것은 다 없어져도 되는 것, 아니 없어져야 하는 것이다. 만약에 어떤 선생님이 분필이 있을수록 좋은 것이라 하여 분필을 사용하지 않고 모으기만 하고 있으면 목적이 달성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발사한 나로호의 1차 실패 원인은 페어링이라는 발사체의 일부가 임무를 다한 다음에는 분리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치 그것처럼 온전한 것, 목적이 이루어지면 그 과정은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는 유일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인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것을 보여 주셨고, 온 세상 만물의 고대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하셨으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면 철학이던 재물이던 뭐가 되었던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고 로켓의 추진체와 같은 것이니 다 사라지고 변화산에서와 같이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이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 갔더니,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런 것은 해야 한다면서 이것저것을 해야 한다고 사람을 들볶고 또 그런 것을 잘 할수록 신앙이 좋다고 종용하는 것은 로켓이 궤도에 올라가면 추진체는 버려야 하는데, 연료가 남았다느니, 아니면 아깝다느니 하고 그것을 가지고 있는 꼴과 같은 것이다. 


그 결과는 자명하다 바로 추락인 것이다. 그와 같이 교회도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외에 재력이나 신분이나 학식이 있으면 있을수록 좋다고 가르치고, 세상에서 성공해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하는 것은 교회가 망하는 변질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명심할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신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이라 하셨고, 그 아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 세상의 모든 것이고, 만물이며, 철학과 지식과 재물과 신분이라는 그 모든 것이 다 충만한 예수님은 육체로 오셔서 아무 것도 없이 십자가에서 로켓이 괴도에 오르듯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분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사실이 모든 신성, 즉 하나님의 신이 추구하는 모든 신성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육체 안에 충만하게 하신 것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나 각 개인의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무엇을 더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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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세상의 것이 교회 안에서 가미가 되면 안 되는 것인가? 흔히들 하는 말로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말도 있는데, 기왕이면 더 재력 있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 등용되면 좋은 것 아닌가 싶겠지만, 그것은 두 가지의 잘못된 점이 있다. 그 하나는 그렇게 된다면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교회를 누리기 힘든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것이 문제인데,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이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돈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역차별을 받는 것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만약에 그 사람이 그 가진 것에 대하여 전혀 의가 없고, 교회 안에서 신앙에 관해서 자신이 가진 재력에 상관없이 말씀을 들을 자리에서는 듣고, 또 가르칠 자리에서는 가르치는 자기 자리를 분명하게 아는 사람이라면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오히려 교회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볼 때 은혜롭게 받아서, 그 모습을 볼 때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돈과는 무관하구나!’라는 말을 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좋을 수도 있지만 기왕이면 돈 있는 사람이 좋다는 식의 사고방식이라면 돈 없는 사람은 외면 받는 복음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가난한 사람이 외면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변질 것이다.


이는 복음의 근간을 흔드는 중요한 문제이기에 이것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복음은 심각한 변질을 가져오게 된다. 얼마 전에 교황이 새로 취임하면서 교황이 끼는 어부의 반지를 금으로 하지 않고 금도금으로 한다면 청렴한 교황인 듯 기사가 났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게 아니다. 교황이 왜 금반지를 끼는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그것이 문제이다. 교황이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이라면, 금반지를 끼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말라는 이야기다. 만약에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그 어부의 반지를 낄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반지를 금으로 하느냐? 아니면 금도금으로 하느냐? 가 문제가 아니라, 교황은 그 반지를 끼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여기는 생각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만약에 교황이 자신이 가진 금반지든 아니면 금도금 반지든 상관없이 어부의 반지와 또 그가 입은 옷과 또 그가 기거하는 교황청과 같은 이런 모든 것을 다 버렸는데도 그 사람의 신앙이 모든 사람이 보기에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고백을 자아내는 사람이냐 하는 것이 교황의 정체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또 하나의 나라로 인정받는 교황청에 산다는 것은 분명히 세상적인인 대접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에 교황이라는 칭호와 교황청과 그의 예복과 금반지가 가미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것 하나 없어도 교황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그래야 교황인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그런 것 하나도 없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교황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의 모든 큰 교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 교회의 건물이 없어도, 목사의 모든 학력을 다 버려도, 교회의 모든 재정이 하나도 없어져도 교회고 목사여야 비로소 교회고 목사인 것이다. 그 바탕에서 다만 예배의 편리를 위해서 필요한 것만 능력 되는대로 갖추어 가면 된다. 그리고 그마저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어야 교회이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음향시설이 있었던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큰 교회들은 좋은 음향시설이 있어야 좋은 예배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지금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에 경계하는 교회의 변질인 것인데, 지금의 큰 교회들은 그것이 아예 습관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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