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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골로새서는 기록된 배경은 계속 언급하게 되지만 초대 교회 당시에 교회 안으로 세상적인인 사상, 즉 철학과 또 영지주의 또 천사숭배 같은 사상들이 들어오는 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가 경계하기 위한 편지이다. 


물론 이러한 경계함과 그런 사상들을 멀리하라는 교훈은 비단 바울 사도뿐 아니라, 요한 사도와 또 다른 모든 사도들이 심각하게 생각했던 문제이다. 그리고 그것은 초대교회의 문제만은 아니다. 지금의 교회도 그러한 문제에 얼마나 침륜되어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사상들은 비단 교회 뿐 아니라, 각자의 신앙에 있어서도 그러한 생각에 입각한 신앙적인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 오늘 우리가 골로새서나 요한 일서 그리고 많은 성경을 교훈으로 받아 가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세상에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적인인 가치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림자요 형식이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망각하고, 내용과 본질을 혼용하여 신앙의 본질에 그러한 형식을 더해감으로 신앙이 좋아진다고 여기는 이러한 변질은 영원한 신앙의 과제라고 생각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세상에 있고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이 실상이 아니라, 이러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설명하시고자 하시는 것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은 형식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자동차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동차는 사람이 사람이나 물건을 옮기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 양식이라는 것이다. 즉 자동차는 자동차가 본질이 아니라, 무엇인가의 이동이라는 목적이 바로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동차 자체를 씻고 가꾸는 것에 너무 목적을 두면서 타는 시간보다 치장을 더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마치 그것과 같이 세상의 모든 것은 표현 양식인데, 그것에 집중하고 그것을 잘하거나 아니면 신앙 안에 그런 것을 잘 할수록 신앙이 좋은 것이라 여기는 마음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바울과 사도들이 경계하고자 한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 안에서 돈이 많을수록 대접을 받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물론 돈만 많고 그것만 자랑하는 사람을 교회에서 우대하는 정도의 교회는 잘 없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세상에서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정도의 삶이라고 할 때 그때는 신앙의 어떠함 보다는 기왕이면 돈이 더 많은 사람이 쉽게 장로가 되고, 기왕이면 박사나 교수가 더 쉽게 장로가 되는 이 현실이야 말로 바울 사도가 심히 경계하던 골로새 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물론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검증하고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교회의 현실이 그렇다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교회의 장로 구성을 봤을 때,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는 교회는 그렇게 많지 않다. 


또 시각을 바꾸어 목사를 한번 보면, 교회가 목사를 청빙할 때 기준이 어떠한가? 어디서 공부했는가? 어떤 대형교회에서 전도사 시절을 보냈는가? 하는 것을 그 기준으로 삶고 있는 것은 거의 모든 교회가 보이고 있는 형태이다. 하다못해 목사가 신학 시절 작성한 논문 한번 보지 않고, 그 목사의 신앙 고백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지 않는다. 


그것은 그 교회의 가치관이 신앙보다 스펙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 스펙이라는 것이 하나 같이 다 세상에서 좋게 여기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그 세상의 요소들이 다 형식이요, 그림자며 그것이 한 사람의 신앙을 볼 때 가산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 골로새 교회의 형편을 보면,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를 세움에 있어 그 어떤 세상적인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 오직 바울에게서 전해들은 복음 그 하나 만으로 교회를 세웠는데, 교회 안으로 세상적인인 역량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들어오면서 그 사람들이 가진 세상의 철학이나 가치관을 보고, 신앙보다 그것을 가진 사람들을 더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기는 현상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이러한 현상을 분명한 교회의 변질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람들이 신앙 이외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세상적인인 철학과 가치관을 가질수록 더 좋은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속이는 사람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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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 발전소의 디아코니아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4. 1. 13:32 Writer : 김홍덕

원자력 발전소에서 전기를 발전 시킬 때 전압이나 전류는 어느 정도 일까? 전기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정확한 값도 모르고 인터넷을 뒤져봐도 뭐시기 저시기 적혀 있는 내용을 내가 다시 해석해서 글로 쓰기에게는 지식이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내가 한가지 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적어도 220V는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 우리가 가정에서 사용하는 전압의 100배 이상은 되지 않을까 싶다. 원자력은 굉장한 에너지다. 그것으로 많은 폭탄을 만들어 놓아서, 그것을 다 쓰면 지구를 몇 십 번이나 초토화 시킬 수 있다고 하기도 한다. 그 정도로 폭발력이 있는 에너지가 바로 <원자력>이다. 그것을 가정에서 사용하게 만들려고 하면 그것이 참 대단한 일이 아니겠나 싶은 것이다.

 

(영광 원전 6호기 모습)

 

원자력 발전소에서 발전된 엄청난 에너지를 우리 가정에서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전하는 것에 대한 교훈을 얻어본다. 만약에 바울이라는 사람이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자신이 보는 정도를 보아야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전했다면, 아마 지금 우리나라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람이 당시에도 몇 없었을 것이니, 그게 어떻게 이 동양에까지 전해질 수 있었겠나 싶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바울은 자신이 보는 신앙 안에서의 계시가 어떠하던 간에 사람들에게 전할 때에는 원자력으로 발전된 전기를 가정용으로 공급하듯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말씀으로 전했다.

 

그것은 내용을 축소하거나 감추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안목을 복음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기준, 즉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자리, 그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것을 전했던 것이다. 그렇게 수고한 바울, 요즘 말로 <고객만족>이라는 관점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자기가 볼 때 너무나 답답한 인생들의 모습에도 복음 전파라는 그 목적으로 인하여 모든 수고를 감당했던 것이다. 마치 수 만 볼트 전기를 가정용으로 바꾸는 수고와 같이 말이다.

 

그리고 이 복음의 신앙은 씨를 심고 가꾸는 것이지, 나무를 옮겨 심는 것이 아니다. 나무는 그 모든 역량을 씨에 담는다. 그리고 그것을 전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나무를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생명은 다 그렇다.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인 씨를 심듯 전하는 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삶인 것이다. 모든 인생은 다 흙과 같으니, 흙에 씨를 심는 것과 같이 그 속을 갈고 파듯 함께 어울리는 삶으로서 씨를 심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가꾸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디아코니아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배워야 할 신앙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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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절을 해 보았는가?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3. 28. 15:50 Writer : 김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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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 개봉한 영화 <신기전>의 마지막 장면에는 왕이 나라를 구한 후 돌아서서 가는 주인공 남녀의 뒤에서 그들에게 절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옆에 있던 신하들이 만류하지만 왕은 “사신에게도 4배를 하는데 내 백성에 절을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하며 한마디 더 한다. “짐은 왕이요, 그대들은 황제니라” 라고…

 

사람이 사람을 경배한다는 것은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무엇으로 보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볼 때, 자기 안에 어떤 작은 기준이라도 있다면 그 기준으로 상대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 즉 잘잘못을 따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서 용서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 사람들 사이가 어떠하던 그 일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자기 안에 사람을 보는 기준이 없어진다면? 사람이 사람에게 절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위한 성전과 같은 존재라면 이야기는 더더욱 쉬워진다. 옛날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성전이 있는 방향을 향해서 절을 했는데, 그것은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심을 믿는다면? 그렇게 사람을 수용해 보았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위하여 절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신기전에서 왕이 백성에게 절하는 장면은 신분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나라의 근본이 백성에게 있다는 본질을 안다면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그렇듯이 우리가 사람의 외모와 신분에 관해서 어떤 기준을 가지고 보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근원이 백성이라는 본질처럼,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기 위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거하심을 안다면 절을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숭배가 아닌 경배로서 말이다.

 

우리가 대통령처럼 권력이 있는 사람을 만나도 머리를 숙이는데, 한 사람이 진정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살아가는 것을 본다면 마음에서 우러나서 경의를 표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사람에게 경의을 표해 보았는가? 그것은 삶에 있어 진정한 행복 중의 하나이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 말이다. 내게는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것이 신앙 생활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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