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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냉장고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4. 3. 17:29 Writer : 김홍덕

냉장고를 보니 많이 비었다. 한 때는 가득 찬 냉장고를 보면서

‘이건 언제 먹으려고 여기에 있나?’ 싶을 정도로 많은 것이 쌓이기도 했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장을 안보고 못보고 하니

하나씩 다 꺼내 먹고 이젠 정말 거의 먹을게 없는 상태처럼 비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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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빈 냉장고를 보며, 이전에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냉장고가 다 비는 인생이 되었구나! 삶이 참 처량하고 허무하구나!”와 같은 생각들을 ……

그리고 나는 그런 생각 안에서 삶의 허무함을 교훈 받았다고 이야기 했었다.

 

그런데, 이젠 전혀 다른 교훈을 얻는다.

“이전에는 너무 과욕하며 살았구나!”

“우리 인생이 살아가는데 많은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구나!”

“육신의 것은 이만하면 족하구나!” 생각해 본다.

 

물론 가득 찬 냉장고는 마음을 부유하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영혼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우리 육신이 살아 가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어리석은 부자와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던 말씀이 참말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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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2:8-15 세례로 죽고 살아남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3. 4. 2. 16:55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세례를 받으셨다. 알고 보면 예수님의 행적은 다 말씀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니 산다는 것 그 자체가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러한 모습, 즉 삶이 그리스도인 삶은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예수님께서 세계를 받으신 것은 씻어야 할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세례의 의미를 깨달을 때 예수님과 같은 삶이 된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세례의 원어는 밥티스마(Baptisma)라는 용어인데, 뜻은 ‘물에 잠기다’는 의미이다. 즉 세례는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의식이라는 의미이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 보면, 이 단어를 두고 침례가 맞느니, 그냥 물만 머리에 뿌리는 세례가 맞느냐 논쟁하고 종파가 갈라져 있는데, 이건 참 할 말이 없다. 그런 것이 바로 할례를 받지 못한 신앙이기 때문이다. 세례 예식의 모양, 즉 형식에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것은 다 신앙 없고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지 않고, 형식에 의미를 두고 있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마음일 뿐이다.


어떻던 세례의 의미는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인데, 물에 들어가면 사람이 살 수가 없다. 즉 세례라는 것은 어떤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즉, 물속에 빠진 사람, 즉 죽게 된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예표 하는 것이 바로 세례의식인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물은 율법을 말씀하기도 하고 또 큰물은 세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율법 속에 있으면 죽게 되는 존재, 또 세상에 잠기면 죽게 되는 존재가 그 죽을 자리에서 벗어나게 됨을 증거하는 예식이 바로 세례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은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했다. 


그렇다면 무할례와 세례는 어떤 상관이라는 것인가? 아니 전체적으로 볼 때 할례와 세례는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 것이기에 이 두 가지 의식을 가지고 지금 골로새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대하여 권면을 하고 있는 것일까?


창세기 6장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창 6:2-3)

이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이 바로 하나님께서 홍수를 일으키신 이유인데, 이는 지금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경계의 말씀을 하는 이유와 동일한 맥락이다.





지금 골로새 교회는 세상의 철학과 과학을 신앙에 접목하려 하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은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성경에서는 여자(육신으로 여자가 아님)는 아들을 낳는, 그러니까 남자의 의를 사람으로 낳는 형식을 의미하는 존재를 말하는 것인데 그렇다는 것은 세상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은 세상적인 것을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의 아내로 삼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에 있어 세상적으로 좋아 보이는 과학이나 철학 또 세상의 성공이나 재물과 명예와 같은 것을 베필로 삼는다는 의미이기 떄문이다.


창세기에서는 그 결과 네피림이라는 위대한 자가 나왔고, 교회가 세상의 것을 받아들인 결과 세상적으로 훌륭한 건물과 제도와 권력(교황과 같은)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알았기 때문에 골로새 교회에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의 마음은 결국 노아의 홍수로 이어졌고 다 멸망당했었는데, 그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 바로 세례이기 때문이다. 즉 세례는 세상적인 것에 잠겨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세례를 받은 사람은 신앙을 세상적인 것과 결합하는 것과 위대함을 낳는 신앙 안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물에 잠겨서 물에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나와서 고백하는 세례를 받고서 다시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죽고 다시 산 것이기 때문에 다시 동일한 이유로 죽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할례는 형식을 벗어 버리라는 것이고, 세례는 형식에 잠기면 죽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계획 아래 사람에게 주신 예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느 것이 되었던 하나님께서 전하고자 하시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의미를 깨닫는 자가 되라고 하시는 것이 목적이지 그 의식을 잘 지키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셨다고 하면 다 지켜 행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율법이 물에 비유되기도 하는데, 그 물속에 푹 잠겨보면 ‘아 죽겠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세례를 주신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홍수처럼 넘쳐나는 형식만 보이는 물 밖에 없는 세상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세례라는 것이다.


즉 세례는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죽게 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알게하기 위하여 주신 규례를 지키는 것이 전부인 줄 알면 죽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주신 목적을 아는 것이 진정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창세기에서 홍수의 원인이 되었듯, 세상의 철학과 과학과 같은 형식적인 것이 신앙에 더해지면 더 위대해진다는 것에 매료되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례를 받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의 모든 형식이 다 그러하다는 것을 바울 사도가 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가 사람들이 세상과 종교의 형식을 고집하다 보니, 그 형식이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하여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못 박아 버린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형식으로 인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우리가 보면, 우리 역시 그런 형식들로 승부하는 세상과 종교적인 규례 안에서는 죄인이 된다는 것을 늘 몸으로 알고 살기 때문에 쉽게 그것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는 것이고, 함께 장사 지내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예수님의 모습에서 내가 발견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심 같이 살게 된다는 말씀이니, 세례가 물에서 나오는 것과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형식과 규례로 인하여 못 박히셨으나 살리셨던 것 같이, 우리도 형식에 관하여, 세상에 관하여, 또 종교적인 규례를 지키는 것에 관하여 그것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 우리 죄를 자복하는 것이고, 그 모습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심과 같이 우리를 살리신다는 것이 바로 세례를 말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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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는 우리가 아는 대로 지금의 포경수술이다. 그 포경수술과 같은 할례가 종교적으로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유대인들에게 이것은 선민사상의 증표이기도 하다. 즉 유대인은 하나님이 택한 민족이라는 선민사상의 증거이고 그것만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 신앙 안에서는 심각한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기도 했다.


할례라는 것은 남자의 생식기 끝에 있는 표피를 잘라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도무지 영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기에 그 옛날에 돌칼로 찢어내듯 잘라내면서 까지 그렇게 해야만 했다는 것인가? 그것은 껍질에 대하여는 버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는 할례를 행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삭은 할례를 행한 이후에 얻은 아들이었다. 사실은 아내가 정부인인 사라냐 아니냐 보다 이것이 더 중요한 기준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는 형식이 벗겨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셔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생명을 얻는데, 그 생명이 껍질이 벗겨진 신앙으로 얻은 아들이라야 진정한 아들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는 세상은 항상 내용과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형식에 의미와 의를 두고 그것이 있어야 온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에서 벗어나야만 진정한 신앙이라는 말씀을 하시고자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것이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런 내용은 버리고 형식을 벗어 버리라고 주신 법을 오히려 형식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항상 그들의 신앙이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책망을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골로새 교회에서도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더 큰 의미는 바로 신앙에 있어서 형식을 벗어 버려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심청전의 의미가 효에 있지, 심청이 에게 있는 것이 아니듯이…… 하지만 그렇다고 육신이라는 형식을 벗어 버리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 여기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바로 영지주의다.


이는 형식을 벗어 버리라는 것은 내용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은 안되는데 이삭은 되는 것은 형식이 벗겨진 가운데 표현된 아들이기 때문이다. 즉 형식이라는 것이 무작정 버려야 좋은 신앙이 되기 떄문에 할례를 행하게 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형식이 아닌 내용으로 표현되는 법이 하나님의 뜻임을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할례의 의미인 것이다.


지금 이 골로새 교회의 문제는 세상의 것, 즉 철학이나 기타 여러 가지 사상들이 신앙과 결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안고 있기에, 그러한 학식과 철학은 다 하나님의 표현방식인 형식에 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질수록 신앙이 좋다고 여기는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할례의 의미를 다시 말하면서, 껍데기와 같고 형식에 속한 것을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한 육신으로 할례가 아니라 할례의 의미를 아는 것이 진정한 할례, 곧 그리스도의 할례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할례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비뇨기과 의사가 되어 할례를 행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이신 그리스도라는 성품을 표현하고 설명하기 위하여 만드신 형식이라는 것이기에 그것에 어떤 가치나 의미를 부여할 것이 아니라 온전한 내용을 알아가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할례라는 것이며, 그 진정한 내용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 2: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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