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566

빌레몬서는 아주 짧은 성경이다. 그 내용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아주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단순하게 보면 주인의 돈을 훔쳐서 달아난 종이 바울을 만나서 예수를 믿기로 했으니 지난 날을 용서해 달라는 탄원서와 같은 것이다. 그 종은 오네시모다. 바울이 감옥에서 만나서 복음을 깨닫고 그 심령이 변한 종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가 용납하여 주기를 바라는 탄원서 성격의 옥중 서신이다.

 

하지만 이 빌레몬서는 절대 단순한 성경이 아니다. 아주 짧은 편지 속에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놀라운 복음의 능력, 즉 두나미스와 같은 능력을 증거하는 말씀이기도 하고, 또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존재였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또한 어떠한 것인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성경일 뿐 아니라, 그 복음으로 인하여 공동체가 생성되었을 때, 아니 어떤 놀라운 변화를 겪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와 같은 교회를 이루었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성경이기도 하다.

 

우선 이 빌레몬서의 배경을 보면, 빌레몬이라는 사람에게 오네시모라는 종이 있었는데, 이 오네시모가 주인인 빌레몬의 재물을 가지고 도망을 갔다가 잡혀서 옥에 갇히게 되고 그곳에서 바울을 만나서 그 마음에 변화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고, 바울이 이 오네시모를 그 주인인 빌레몬에게 이 용납해 주기를 청하는 내용이 바로 빌레몬서이다. 그리고 이 빌레몬서는 골로새서와 많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사실 예전에 이 빌레몬서를 읽을 때는 별로 눈에 띄는 성경이 아니었다. 학생시절 레위기를 읽던 것에 비하면 나았지만 나와 상관이 있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거나, 읽으면서 다윗과 요나단의 이별 장면 같은 그런 감동을 주는 성경은 아니었는데, 다시 알고 본 빌레몬서는 아주 놀라운 성경의 한 부분이었다.

 

이 빌레몬서의 구도는 주인인 빌레몬, 그리고 그 앞에 죄를 지은 종 오네시모, 그리고 이 오네시모를 구명하는 중보자 바울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이 구도는 참 놀라운 구도이다. 빌레몬이라는 이름의 뜻은 ‘사랑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은 ‘이익’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큰 자’라는 의미를 가진 사울이 ‘작은 자’라는 의미의 바울로 개명한 사도이다.

 

이 구도는 마치 하나님 앞에서 그 지으신 목적대로 살아야 하는 사람이 그 목적을 버리고 죄 가운데에 가서 사는 것이 옥에 갇힌 것과 같은 삶인데, 그 인생의 삶으로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옥에 갇힌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기 위하여 인생들과 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바울이 오네시모를 신원하듯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 우리를 중보하시는 모양과 동일하다.

 

이 빌레몬서가 이렇게 읽혀지지 않는다면 분명히 그저 2,000여년 전에 있었던 감동적인 내용의 편지로만 보일 것이다. 그것에 기독교 신앙이 더해진다 해도 예수 믿으면 자기 재물을 가지고 도망간 종도 용납하게 되는 것이라는 정도로 받아 들여질 것이다. 사실 그 이상의 설교를 들어보기도 힘들다. 왜냐하면 성경을 자기와 상관이 있는 오늘 나의 이야기로 읽지 않고는 그런 깨달음이 있을 수 없고, 깨닫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설교를 할 수 있겠는가?

 

이 빌레몬서는 빌레몬과 바울 그리고 오네시모를 통하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과,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한 종의 모습으로 감옥 같은 세상에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중보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고 그 뿐 아니라 아들로 또한 신실한 형제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나의 이야기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요 나의 운명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성경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배추김치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4. 10. 17:38 Writer : 김홍덕

예전에는 신앙 안에서 세상의 요소들은 버려져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틀린 생각은 아니다. 신앙 안에서는 싸가지가 없어도 되고, 돈이 없어도 되고, 명예가 없어도 되며, 나이도 상관이 없다. 그런 것은 다 육신에 속한 것이고, 내가 그것으로 인정 받으려 하면 늘 옥상 옥처럼 늘 나보다 강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비단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어도 신앙 안에서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즉, 돈 없다고 예수님처럼 살지 못하는 것 아니고, 싸가지 없다고 예수님처럼 살지 못하는 것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앙 안에서 그러한 것을 떨쳐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불필요해서가 아니다. 그것에 의를 두기 때문이다. 즉, 그것이 있어야 더 옳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이다. 이를테면 예의가 바를수록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생각 말이다. 사실 신앙생활 하는데 예의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계실 때 과히 예의 바른 분은 아니셨다. 그것은 예의가 악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있어야 하나님이 옳다 여기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많은 신앙의 경륜을 거치다 보니,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있어 그런 것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 여기에 어쩌면 성경의 비밀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성경에서 이렇게 하라, 저것을 하라 하는 모든 말씀들이 율법과 같이 그것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해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율법적인 신앙이지만 마음 안에서 그것이 본성과 같이 발현된다면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생명은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고, 가공품은 밖에서 안으로 가는 것이니까 말이다. 즉, 말씀대로 행동하면 예수님처럼 된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되면 그 말씀대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삶에 열심인 것도 그와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교회에 다닌다면 높은 도덕성을 요구한다. 분명히 알 것은 도덕적이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마음에서 도덕적인 삶으로 나타나게 될 수 밖에 없는 생명이 되어 그렇게 산다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행함이다. 그래서 야고보서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즉 안에서부터 아무 것도 표현될 것이 없는 것은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행동해야 믿음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예전에 율법적인 관념 속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 ~~ 해야겠다고 여기던 모든 것들을 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여정이 바로 신앙의 여정이라는 것을 알아가게 된다.어떻게 보면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자리이기도 하면서 원래의 자리이기도 하다. 즉 세상은 열심히 그리고 도덕적이고 양심적으로 살아야 한다. 다만 그래야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배추가 처음에는 뻣뻣하다. 그래야 배추인 줄 안다. 신앙 안에서 보면 그 뻣뻣함은 세상에서 훌륭하고 선한 사람이어야 예수님의 제자인 것이라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배추가 원래 목적인 김치가 되기 위해서 소금으로 그 풀을 다 죽이듯, 사람들도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소금에 저리는 과정을 겪고 나면, 세상의 것을 잘해서 예수 잘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한 본성으로 인해 그렇게 사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배추가 그 뻣뻣함을 다 버리고 나서 김치가 되어서도 그 이름이 배추김치이듯, 사람도 세상의 것에 의를 두고 사는 마음을 다 버리고 나도 세상의 것으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 그에 비할 수 있겠다.

 

image

 

그리고 김치는, 배추 하나가 아니라 갖은 양념이 어우러져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공동체와 하나가 되는 것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김집사의 뜰 > 복음 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식탁에서…  (0) 2013.04.15
짧은 생각 - 순종  (0) 2013.04.12
하나님의 의, 그리고 공의 (2)  (0) 2013.04.08
하나님의 의, 그리고 공의 (1)  (0) 2013.04.08
빈 냉장고  (0) 2013.04.03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하나님의 의, 그리고 공의 (2)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4. 8. 23:32 Writer : 김홍덕

공의, 공동체와 하나되게 하다.

 

하여튼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온갖 욕망으로 가득하고, 세상에서 실패를 거듭하는 삶을 살지라도 나의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이라는 것을 깨닫고 믿는 것이 의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 개인의 가치관을 바꾸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의 세계는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공동체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깨달은 사람들이 개인으로 있지 않고, 또 하나의 사회를 이루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은 교회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교회는 조직으로 구성된 조직 교회가 아니라, 진정한 공동체인 것이다.

 

사람이 개인의 구원을 이룬다는 것도 참 대단한 것이다. 그리고 구원은 신앙의 종착점이나 목적지가 아니다. 마치 그것이 교회와 신앙의 모든 것인 것 인양 가르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일부만 아는 것이다. 구원은 신앙의 시작이다. 즉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구원이 신앙의 종착점이냐, 아니면 시작이냐 하는 것은 아주 큰 차이고 그 영광의 차이가 너무 큰 개념이다. 그리고 구원이 시작이라면 개인의 구원이라는 것이 개인 구원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신앙 여정에서도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의자를 위한 의자가 없고, 교훈을 위한 교훈도 없다. 의자는 사람을 위하여 있고, 교훈은 그렇게 살아가라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구원도 구원에 머물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이 성인이 되면 이성을 찾아 나서는 본능이 발휘되듯, 구원을 인지한다면 교회에서 상품 걸어가며 전도하라고 하지 않아도 전하게 될 것이고, 또 무엇보다 자기와 같은 사람을 찾게 될 것이다.  나 역시 십자가를 새롭게 보게 된 이후에 가장 먼저 마음에 일었던 생각이,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어떤 공동체에 소속된다는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 공동체 안에서 자기의 이익만 챙길 목적이라면 몰라도 하나가 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물론 조직체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공동체는 다르다. 가정과 회사가 다르듯이…. 그렇게 공동체 안에서 일원이 된다는 것은 그 안에 속한 모든 구성원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건 단순한 과제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건 절대 절명의 명제이다. 이것이 없으면 공멸하거나, 아니면 배척을 당할 것이다. 이건 긴 설명이 필요할 수 있다.

 

사람의 몸의 모든 장기는 다 다르고 신체의 부분도 다르다. 그리고 몸은 하나로 움직이는 유기적인 공동체이다. 몸은 모든 기관이 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 한 사람의 삶의 기초가 확립되는 것이다. 바울도 고린도전서에서 이것에 대하여 말씀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공의의 시작이다. 평등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나라가 어려우니 공평하게 모든 사람이 다 100만원씩 내자!’한다면 그것은 평등이 아니다. 형편에 맞게 내어야 공평이요 평등인 것이다. 남여 평등을 이야기할 때, 남자는 여자 보고 ‘군에 가라’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애 낳아봐라’ 하는 것은 평등이 아닌 것이다.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은 이러한 평등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같이 예배 드리고, 교적부에 이름이 같이 올라 있다고 공동체가 아니듯,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그 부르신 분량에 따라, 또 하나님이 주신 육신의 어떠함과 사회적인 역량에 따라 대접하고 인정하는 것이 바로 공의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공동체, 즉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나라는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곳이다. 즉 개인의 구원인 십자가의 도가 다스리는 곳이다. 그리고 그 나라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그 나라안에 있는 모든 것에 내가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영원한 나의 기업이다.

 

잠깐 삶을 돌아보니, 거의 모든 세상의 것에는 열심이지 않은 나의 삶이지만, 욕을 먹던 어떠하던 신앙생활은 열심히 해 왔었다. 그런데 그 어느 순간에도 내가 계획을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한걸음 한걸음 지나고 나서 보니 그 뜻하심을 아는 것이었다. 이제 돌아보니,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하여,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늘 반항하던 내가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순종하고 또 하려는 사람이 되어 왔다. 그러니까, 이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문을 여는 열쇠를 손에 쥐게 된 것이다. 이는 또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김집사의 뜰 > 복음 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짧은 생각 - 순종  (0) 2013.04.12
배추김치  (0) 2013.04.10
하나님의 의, 그리고 공의 (1)  (0) 2013.04.08
빈 냉장고  (0) 2013.04.03
여자, 그 위대한 변신 유전자  (0) 2013.04.02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