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사도는 그의 서신서 모든 곳에서 자신과 동역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특히 빌립보교회는 바울사도와의 관계가 아주 좋았습니다. 그것은 빌립보의 성도들이 바울사도의 복음에 대하여 순종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사도의 옥바라지를 위하여 에바브로디도를 파송했을 정도였습니다.
빌립보교회 정도는 아니어도 대부분의 서신서에서 바울사도는 자신을 대신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로마서는 베베를 통하여 편지를 보내고, 골로새교회는 에바브라와 두기고라는 사람을 자신을 대신할 사람으로 이야기하고 빌레몬에게는 빌레몬의 귀한 것을 훔쳐 달아난 종 오네시모가 입힌 피해를 갚아야 한다면 자신이 빌레몬에게 갚겠다고 까지 합니다.
한 마디로 바울사도는 자신이 동역한 사람들을 신뢰했습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유스도(골 4:11)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할례당이라고 했습니다. 할례당이 어떤 집단인지 자세히 알기는 어려워도 그 이름에서 할례 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유스도라는 사람을 하례에 대하여 로마서 전반에서 많은 이견을 보인 바울사도가 동역자로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사도가 사람들을 신뢰했던 것은 그가 전한 복음의 본질과 상관이 있습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있다면 그 사람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이며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전한 복음을 받은 사람이 그 복음으로 인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고백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사도이듯, 그들 역시 하나님의 의와 뜻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임을 바울사도는 알기 때문입니다.
이는 지금의 교회가 보여주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지금은 목사라는 면허가 없으면 예배를 인도할 수 없고, 교회도 세울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뭣 하나 작은 것을 하려고 해도 교역자가 와야 된다는 식입니다. 이는 목사가 스스로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이 온전한 복음이라면 자신의 복음을 받은 이도 자신과 같은 복음을 받았고 동일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신을 대신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신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지만 자신의 말씀을 들은 사람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되었던 누구라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고 그 복음을 들은 이가 그 복음을 자기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로 받았다면 그 또한 다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과 또 그 말씀을 들은 모든 이들도 자신과 동일한 하나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예수님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나 목사가 사람을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의 정체성이 복음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본질이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그 사람을 주를 대하듯 하는 것이 본질인데, 신학이라는 공부와 목사라는 면허가 있어야 주의 일을 대할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은 지금의 교회와 목사의 정체성은 복음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육신의 공부와 세상과 동일한 방식의 면허에 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는 목사(신학 전공자)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음을 가지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복음은 신학의 공부라는 개념을 정립했고 그 기반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분명하게 육신의 수고, 육신의 행위에 기반을 둔 것이라는 명백한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이 전한 복음을 받은 이가 자신과 동일한 일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대하는 것은 곧 자신의 신앙이 어떤 신앙인지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복음을 믿고 전했고 그 복음을 순전하게 받아 들였다면 전한 사람이나 받은 사람이나 모두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서 그 정체성을 본성으로 살아가는 삶은 동일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 외에 신학이나 육신의 행실과 같은 것이 갖추어져야 된다고 여기는 것은 다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자신이 전한 복음을 받은 이들을 자신과 동일하게 여긴 것은 자신이 받은 복음이 예수님께서 자신을 동일한 존재로 받으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복음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받은 사람은 자신과 동일한 본성을 가진 삶이 된다는 것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다면 바울사도와 같이 자신을 대신 하는 일에 자신이 전한 복음을 받은 사람들을 보내는 것에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삶의 모양이 어떠하더라도, 복음을 온전히 받았다는 것만 있으면 되기에…
(Translation by Google)
(Philippians 2: 19-30) Believing in the gospel, believing in men
The Apostle Paul speaks about people who work with him everywhere in his epistles. Philippians are no exception. In particular, the Philippian church had a very good relationship with the Apostle Paul. It can be said that the saints of Philippi became obedient to the gospel of Paul's apostle. The church of Philippi sent Eva Brooddo for the apostles of Paul's apostles.
In most of the epistles, though not in the Philippian church, the apostle Paul speaks of the man who takes his place. Romans writes a letter through Bebe, and the church of Colossae tells him that if he should speak to him as a man to replace him with Evabra and Dujigor, and pay Philemon the damage of Onesimus, who stole the precious thing of Philemon, .
In one word, the apostle Paul trusted the people he worked with. Particularly interesting is the man named Usudo (Colossians 4:11). He was called a circumcision party. It is hard to know what a group of circumcision is, but it can be seen that those who value circumcision in their name are important. Such a person named Usudo also recognized Paul as a co-worker, who showed much difference in the whole of Romans about Hathare.
It is in this connection that the apostle Paul trusted in the nature of the gospel he preached. The Gospel means that if the righteousness and the will of God is the Son of God, he is the one who takes the place of God and is one with God. Therefore, the person who received the gospel he preached confessed that he was the Son of God because of the gospel, and that the righteousness and the will of God was the purpose of his life, as if he were the Son and the Apostle of God, The apostle Paul knows that he is a man of righteousness and righteousness.
It is different from what the present church shows. This is what we are saying now that we can not lead worship and church building without a pastor license. Everything in the church is true. One thing is that even if you try to do something small, a minister must come. It is that the pastor denies himself. If the gospel he preached is a complete gospel, he who receives his gospel is also given the same gospel as himself, and if he is the same God's Son, he should be able to replace himself. It means that you can do God's work, but you can not do it.
The problem is that it is not the Gospel. It is because the gospel is that anyone who has been a pastor has communicated the gospel of God and that he who has heard it has received the gospel in the sense of his being and purpose of life, he must also be able to preach the gospel and do the work of God. Because Jesus came to this earth, and all His disciples and all who heard it were not only the same Son of God, but also doing greater things than Jesus.
Nevertheless, today's church or pastor does not believe in people because their identity is not evangelical. If the essence of the gospel is the righteousness of God in man, it is the essence of the person to be like the Lord. The fact that the study of theology and the license of pastor are considered to be able to deal with the Lord's work means that the identity of the present church and pastor is based on the Gospel , But that it is in the same manner as the world study and the study of the flesh.
The church now says that there should be a pastor (theology major). This means that studying theology has the gospel of God. That is, the gospel has established and is based on the study of theology. It is also an obvious proof that it is so obviously based on the work of the flesh, the act of the flesh. If not, it is because the person who received the gospel he preached must be able to do the same thing as himself. But it is not.
To treat a person who believes in God is to express what his faith is. When we believe and preach the gospel of the perfect God and accept the gospel purely, we acknowledge that the person who has passed away, the person who received it, or both have the same identity, and that the life of the identity is the same. However, it is not the gospel that thinks that such things as theology and the conduct of the body should be prepared.
The apostle Paul regarded those who received the gospel he preached as his own because the gospel he received revealed that Jesus received Himself as the same being. Therefore, the whole gospel is to know and believe that the person who has received the gospel preached is a life with the same nature as himself. And if you believe it, you will not hesitate to send people who have received the gospel you preached in your work, like the apostle Paul. Whatever the shape of the person's life, it is only that they have received the Gospel in fu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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