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사람의 가장 핵심적인 괴리는 다름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인생을 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만드셨기에 그 모든 것이 논점이 될 수도 있지만 적어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사람에게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또한 사람이 자기 육신의 삶을 보는 안목은 결국 온 세상을 보는 안목과 동일한 것이기도 합니다.
먼저 신앙 안에서 본다면 많은 사람들은 이 육신을 부정하게 봅니다. 사람들이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이유는 육신의 행위나 생각을 서로 알기에 그런 모습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도 확신하지 못하고 노력하고 있다고 해야 겸손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준이 육신의 행위와 생각에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육신은 부정한 것이기에 정하게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노력해서 성공한 사례가 인류 역사상 단 한 차례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공한 사례조차 없는 시도를 부추기는 것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좋은 밥벌이가 될 수는 있어도 사람들에게 복음이 되지는 못합니다. 아직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육신으로는 의롭게 될 사람이 없다고 선언한 것을 계속 시도하면서 노력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겸손인지 무식함인지 알 수 없으나 어차피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바울사도가 할례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할례라는 종교 의식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행위가 의로워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의로움이 우리로 하여금 기쁨이 되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도입한 대명사입니다. 대표적인 사례라는 것입니다. 손할례당이라는 것은 손으로 할례를 행하는 것이고, 그것은 육신으로 율법을 지켜낸 것이라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손할례당이 아닌 사람들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육신으로 의로워지는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육신을 무의미하게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봉사한다는 것은 성령이 본성이 되어 그 본성이 섬김의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기 위해서 교회에 가서 봉사하고, 노숙자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성령이 계셔서 그 성령께서 하시고자 하니 그 육신이 그것에 따라 봉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육신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셔야 하는데,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신앙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육신이 부정해서 늘 깨어 있기 위해서 수련하듯 해야 하는 사람의 육신은 거룩하지 않은 것이니 그 안에 성령이 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오시기를 구하기는 합니다만 잘 되진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자랑한다고 하니 “우리 집에 금송아지 있다.”는 말과 같이 “내가 믿는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시고 나를 구원하신 분”이라고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계시지도 않는 예수님, 죄는 내가 짓고 벌이나 대신 받는 예수님을 자랑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자랑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계셔서 그 그리스도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드러나서 등경 위에 둘 수밖에 없어서 자랑이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자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육신이 부정하기 때문에 늘 근신하고 깨어 있어서 죄에 빠지지 않도록 자기 행위를 절제해야 하는 사람은 자신이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어떻게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겠으며, 또 계시지 않는 예수님을 자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적어도 자기 안에 성령과 그리스도께서 계시려면 자신이 성령과 그리스도를 모시기에 합당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이라는 존재는 그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기에 너무 온전한 존재로서 만드셨는데 사람들은 그 목적은 보지 않고 사람이 가진 본성과 행동만 보기에 그것을 보고 있노라니 구원도 요원하고 거룩함도 요원하기 때문에 그 거리를 좁히고자 무단히 자기를 절제하고 단련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가진 본성은 그 자체가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 사용되는지, 어떤 목적에서 그 본성이 사용되는지에 달린 것입니다. 화내는 본성은 그 자체가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가 훼손당하는 것을 볼 때 화가 나지 않으면 오히려 부정한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기에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고 노력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그 삶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기쁨은 자기가 부정하게 보는 육신을 벗은 천국에서 누릴 것만 기다립니다. 그것이 바로 손할례당이고 개와 행악자의 삶이라고 바울사도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진정한 할례라는 것은 육신이라는 이 껍질 넘어 있는 속사람, 즉 존재의 목적을 아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목적을 아는 사람은 그 심령에 하나님의 성령과 그리스도가 임하셔서 껍질이 벗겨지고 드러나듯 육신으로 성령이 이끄는 봉사를 하고 그리스도가 자랑이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Translation by Google)
(Philippians 3: 1-16) True circumcision
The key difference between God and man in the Bible is not the difference, but the point of view of the life with the flesh. Of course, because God created the whole universe, all that matters may be an issue, but at least that is what God speaks to man. And in fact, that's all. Also, people's eyes that see the life of their own flesh are the same as those of the whole world.
Many people see this flesh unclean if they are first seen in faith. The reason people see the flesh unclean is because they know the acts or thoughts of the flesh so that they can not be saved before God in such a way. That is why it is humble to say that salvation is not working with certainty. Because the standard of salvation is in the act and thought of the flesh.
The problem is that faith is so unfair that the body should try to be determined. That's because there has never been a single case of success in human history. Encouraging attempts without even such a successful case can be good for religious leaders, but it is not a gospel to people. It is clear that it is not humble or ignorant to say that it is human duty to continue trying to declare that God has not yet been successful, and that God is also righteous in the flesh.
The apostle Paul speaks of circumcision. But this is not about the religious ceremony called circumcision. It is a pronoun that we have introduced to tell us whether the acts of the flesh can be justified, and whether the righteousness is our joy. It is a representative example. It is because the circumcision of a hand is to perform circumcision by hand, and it is a story that the law protects the law in the flesh.
On the other hand, there are people who are not handcuffs. There are people who are not born in the flesh. They are those who serve the Spirit of God, boast of Christ, and do not trust the flesh. Not trusting the flesh means not that the flesh is meaningless, but that it can not be justified by the act of the flesh.
Serving with the Holy Spirit means that the Holy Spirit becomes the nature and that the nature appears as a service life. In order to be made righteous before God, we are not to go to church, to serve the homeless, but to have the Holy Spirit in our hearts, and the Holy Spirit to serve us. This means that the Holy Spirit of God must dwell in the flesh, and it is impossible for faith to see the flesh as unclean. The body of a man who has to be like a trainee to be alert because he is unclean is not holy, and the Spirit can not dwell in it. Of course, though, I ask for the Holy Spirit to come, but it will not work out.
I also said to boast of Christ. It is not to boast that "I believe Jesus is the one who raises the dead and saves me" as the saying "I have a golden calf in my house." Jesus, who is not in himself, what is the use of sin, which I have boasted, that I have built and boasted, and received Jesus? To be proud of Christ is to say that Christ is in him, and that he is proud because he must be revealed in his pocket like a prong in his pocket.
This is also true of pride. Because he is unclean, he is always self-guarded. He who is awake and has to abstain from his actions so that he will not fall into sin is an unclean person. How can we not boast of Jesus, who is holy in Him, and Jesus who is not in Him? In order to have at least the Holy Spirit and Christ in you, you must be worthy to have the Holy Spirit and Christ.
But God created man as a being that is so perfect in God that he dwells in it, and man sees it in his nature and actions that he does not see its purpose. Because salvation is also an agent and sanctification, In order to narrow the distance, I try to control and train myself. But the nature of man is not itself unclean. It depends on where it is used, and on what purpose it is used. The nature of anger is not itself unclean. When we see that the righteousness of God is destroyed, if we are not angry, we are unclean.
I do not know this and I am not sure of salvation. So there is no joy in that life. Joy waits only for the naked body to be seen in unclean heaven. It is the apostle Paul, who says that it is the circumcision of the hand and the life of dogs and evildoers.
In fact, true circumcision tells us that it is to know the purpose of being, the inner being beyond the bosom of this bark. The person who knows the purpose is that the Spirit of God and Christ come to the soul, and as the skin is peeled and exposed, it serves in the body led by the Holy Spirit, and Christ is proud. And when you become such a person, you become a person who enjoys 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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