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는 하나의 종교적인 의식입니다. 행위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할례에 대하여 자주 이야기하는 것은 할례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울사도가 할례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행위에 관한 것을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말하고 있는 ‘손할례’가 그것입니다. 행위로서 육신에 행한 할례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빌 3:2)
바울사도는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다시 ‘기뻐하라’고 말씀하면서 ‘개(dog)를 삼가고 행악자를 삼가라’는 말씀을 합니다. 그리고 손할례당을 삼가라고 합니다. 개와 손할례당, 악을 행하는 것은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뻐한다는 것은 개를 삼가고 악을 행하는 것을 삼가며 육신에 행한 할례를 신봉하는 자를 삼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육신으로 의롭게 된다고 여기는 사람은 개와 행악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특이한 것은 ‘개’인데, 성경에서 개는 자기가 토한 것을 먹는 동물로 나옵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 26:11)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2)
성경에서 개를 좋지 않은 동물로 표현하는 대표적인 개의 본성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이 토한 것을 다시 먹는 습성 때문입니다. 토했다는 것은 자기 안에서 나온 것을 말합니다. 자기 안에서 나온 것으로 자기를 채우는 것을 개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좀 쉽게 이야기 하면 돛단배 안에서 돛에다 부채질을 해서 항해를 하겠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왜 사는지를 명확하게 모릅니다. 그렇다보니 인생 자체에 목적을 둡니다. 더 정확히는 육신의 삶 자체가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육신이 잘 되면 하나님께서 아니면 신이 축복한 것이라고 생각할 뿐 아니라 인생이 성공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자신 즉 인류가 만든 모든 물건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이 사용할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으면서 존재하는 자신은 육신의 삶 자체에 목적을 둡니다. 그러니까 삶의 목적이 이미 존재한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자기 삶에 채웁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개의 본성, 자신이 토한 것을 먹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성경이 시작에서부터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육신의 삶을 본질로 보고, 그것을 만족 시키려는 삶은 절대로 기쁘지 않습니다. 육신의 욕심이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것이 그것이고, 죄를 낳는 욕심이 또한 그것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그래서 기뻐하라는 권면에 이어서 기쁘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반복적으로 권면하는 모든 것이 결국 이것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이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하면 기쁘지 않기에 예수님께서 보이신 존재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존재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것이나, 육신의 삶을 본질로 보는 것은 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교회에 가서 ‘기뻐하라’는 설교를 들을 때면, 기뻐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육신의 삶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고, 괴로워도 억지로라도 기뻐해야 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개와 같고, 손으로 할례를 행하는 것과 같으며,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고 기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Translation by Google)
(Philippians 3: 1-16) To rejoice,
Circumcision is a religious ceremony. It is an act. It is not the circumcision itself that the Apostle Paul frequently talks about circumcision. The apostle Paul speaks of circumcision is to talk about the act. It is the "hand circumcision" which Philippians 3 says. A circumcision in the flesh as an act is meaningless.
Beware of dogs, beware of evil workers, beware of the concision. (Philippians 3: 2)
The apostle Paul speaks to the saints of Philippi, saying, "Let them rejoice, and refrain from the dogs and the evildoers." And I say to avoid hand circumcision. Dogs and handcuffs, doing evil is the same thing. And there is no joy in it. Rejoice is to refrain from dogs, refrain from doing evil, and refrain from those who adhere to circumcision in the flesh. That is, those who believe that they are righteous in the flesh are like dogs and evildoers.
What is unique is the dog, which in the Bible comes out as an animal that eats what he vomits.
As a dog returneth to his vomit, so a fool returneth to his folly. (Proverbs 26:11)
But it is happened unto them according to the true proverb, The dog is turned to his own vomit again; and the sow that was washed to her wallowing in the mire.(2 Pet. 2:22)
In the Bible, the typical dog nature that expresses a dog as a bad animal is not something else, but the nature of eating it again. Vomiting refers to what comes from within. It is likeness to a dog to fill himself with self. So if you talk about this a little easier, it's like sailing in a sail in a sail.
People do not know why they live. So, I aim at life itself. More precisely, I think that the purpose of the physical life itself is the purpose. So, if the body is good, I think that God is not only blessing God, but also that life is a success. All of the things that are created by human beings, not the object itself, are intended to be used by humans, but they themselves exist in the life of the physical body itself. So the purpose of life came from a person who already exists. And I fill that purpose in my life.
This is the nature of the dog that the Bible speaks of, eating what you vomit. It also says that the Bible is constantly "evil before God" from the beginning. And above all, I am absolutely delighted to see the life of the flesh as the essence and to satisfy it. Because the greed of the flesh is endless. It is the lust of discernment, the lust of the flesh, the pride of this life, and the desire to produce sin also originates from it.
The apostle Paul is following the counsel to rejoice, and is telling what life is unpleasant. All that is repeatedly exhorted by the Apostle Paul is, after all, this. If life does not know the purpose of self-existence, then it is not pleasing to know that Jesus must know the purpose of being. It is because there is purpose of existence in it.
And to be justified by the act of the flesh, or to regard the life of the flesh as an essence. That means that you can rejoice. This really needs to be engraved. Because today when we hear the sermon "Rejoice," we are told that we should rejoice because we will bless God in the life of the flesh. But it is like a dog eating a vomit again, like circumcision by hand, and above all, doing evil before God. We can not do evil and rejoice before God.
'평교인의 성경 보기 > 빌립보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빌립보서 3:1-16) 육신으로 나지 않은 의로움 (0) | 2017.08.12 |
---|---|
(빌립보서 3:1-16) 진정한 할례당 (0) | 2017.08.11 |
(빌립보서 2:19-30) 복음을 믿고, 사람을 믿고 (0) | 2017.08.07 |
(빌립보서 2:19-30) 디모데를 보낸 것은 사람을 믿는 신앙의 모습 (0) | 2017.08.06 |
(빌립보서 2:12-18) 나와 함께 기뻐하라 (0) | 2017.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