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4 – 교회의 기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5. 26. 10:09 Writer : 김홍덕

(4:1-31)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치유한 일로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에서 심문받게 되었는데 오히려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더 믿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 앞에서 나사렛 예수가 앉은뱅이를 치유했다는 설교는 그들을 놀라게 했다.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하듯 추궁한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과 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나름 종교 지도자들로 오늘날과 대조한다면 신학을 전공한 사람인데 오히려 그들이 생각하기에 보통 사람인 베드로와 요한의 설교에 놀랐다는 건 신학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깊이 생각할 부분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잡히고 풀려나는 동안 교회는 기도했다. 그리고 이어서 베드로와 요한이 풀려나자, 교회는 더 아름다워졌다. 교회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인데, 이번에는 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교회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나?

교회가 기도한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고쳤다는 이유만으로 잡힌 게 아니다. 핵심은 앞서 글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어떤 권세>로 능력을 행하느냐인데 베드로와 요한은 나사렛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앉은뱅이를 낫게 했다고 했고, 이는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에게 심각한 도전이 되었다. 그들의 신앙관, 그들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요구하는 신앙관에 따르면 나사렛은 선한 게 나올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칭하려면 모든 율법을 지켜내고, 가난과 독립 같은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것이 또한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달랐다.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인간이 구원을 얻을 유일한 이름이라고 전했고, 이를 인해 사람들이 (남자만) 오천 명이 더 믿게 되었다. 이건 종교 지도자들에게 심각한 도전이었다. 그들의 신앙은 물론이고 유대교와 유대인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이 오히려 백성들의 신앙이 되고 있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진정한 교회는 이런 흐름을 바로 인식했다. 더욱 기도에 힘썼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교회의 지도자인 베드로와 요한이 붙잡혀 있으니 풀려나기를 기도한 것 같지만 본질은 더 깊은 의미가 있다. 교회가 기도한 것은 예정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치 주기도문처럼.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 4:28)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면 따라오는 성령 충만

교회는 단지 베드로와 요한의 육신이 구속된 상태에서 풀려나기를 구한 게 아니다. 이 성경을 통해 우리는 교회가 육신의 문제 해결을 하나님께 간구한 게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기도한 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래야 한다. 세상과 사회의 정치문제나 성도들 삶의 문제는 교회의 본질적 관심 대상이 아니다. 그런 문제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면 다 해결되는 종속된 문제다.

 

여기서 핵심적인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은 다른 게 아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은 육신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생각한다. 사람의 이런 생각은 확정적이고 고착되어 있다. 그래서 취직할 것인지, 대학원 갈 것인지, 이 사람과 결혼할 것인지, 저 사람과 결혼할 것인지를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그걸 알고자 한다. 모두 육신의 문제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그런 걸 기도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건 무당 짓이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은 단지 하나다.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그 하나다. 그 목적은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표현하시겠다는 것이며, 표현하시고자 하는 내용은 십자가를 지는 낮아짐이다. 하나님께 그런 성품이 있다는 걸 나타내시려는 게 사람을 향한 단 하나의 뜻이다.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를 바로 읽었다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이 하나밖에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들 성경을 자기중심적으로 읽어서 이게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어둡다고 하신다.

 

앉은뱅이를 고치는 능력의 근원인 나사렛 예수를 믿는 믿음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낮아지는 하나님의 성품이자 그리스도의 본성 이것이 사람인 나에게 이루어져야 하는 단 하나의 하나님의 뜻임을 믿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바로 이걸 믿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게 바로 나의 정체성이며, 내 인생의 의미이자 목적이란 걸 믿는 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다. 교회는 이걸 구하는 공동체다.

 

놀라운 건 교회가 이것을 구했더니 성령이 충만해졌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교회에 모여 성령의 충만을 구한다. 그러나 이 성경에서 보듯 성령은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는 그 자체다. 성령은 기적을 일으키는 신비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되도록 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잉태되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말씀하신다. 성령은 사람이 나사렛 예수를 믿게 하시는 분이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게 바로 성령 충만

 

따라서 교회와 사람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 사람이 믿어야 하는 유일한 이름을 구할 때 응답하시고, 그렇게 사람이 거듭나고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게 되는 그것이 성령의 충만이다. 즉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사람의 삶이고, 결과지 성령 충만 그 자체를 목적으로 구하는 대상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한 그 뜻을 주기도문의 의도대로 구하면 성령은 그저 충만해진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고, 하나님의 영이 본성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 이상으로 충만할 수는 없다.

 

교회는 많은 것들을 구한다. 심지어 사회 참여를 사명으로 여기고 정당을 만들기까지 한다. 또 가난한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무료로 급식한다. 그리고 이런 활동을 하는 교회가 더 발전하고 동참하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능력이 나타나기를 구한다. 사람들이 동경하는 일들이 교회에 가서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사례가 많아지기를 바라고, 얼마 간의 성공을 전도할 때 사람들에게 전한다.

 

오늘날 교회가 기도하고 힘쓰는 모든 건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면 자연스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활동들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게 있다. 바로 사람을 향해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앞에 열거한 오늘날 교회의 기도와 간절함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다.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진 사람에겐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처럼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람이 모여 계획하고, 예산을 편성하고, 당번을 정해가며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사도행전은 그렇게 된다는 걸 이어서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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