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11)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일은 아주 유명한 일화다. 아마도 많은 신앙인이 이 말씀에 대한 설교를 들었을 것이고, 주된 내용은 하나님께 드리는 데 인색하지 말라거나 아니면 헌금하기로 한 건 착복하지 말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드리라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굳이 비꼰다면 그건 하나님께 헌금을 드려서 원하는 바를 얻겠다는 삯꾼들의 설교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교회의 필요를 떠나서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다. 즉 교회의 필요와 헌금의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교회의 필요와 무관하게 드리는 헌금은 베드로 사도의 말씀대로 그 자체로 성령을 속이는 일이다. 사람이 괜히 돈을 쓰지는 않으므로 교회의 필요가 아닌데 헌금한다는 건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 목적을 예수님께서는 <장사하는 것>이라고 책망하셨다.

 

이 사건은 단순히 헌금 횡령과 거짓말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 아니다. 교회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드릴 것을 자기 맘대로 사용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설교할 일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가 봐야 하는 핵심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다. 한 가지 자기들이 그 가치를 정했다는 건 분명하다. 밭을 판 돈에서 얼마를 감추었다는 건 계산이 수반되었다는 것이고, 가치를 계산한 결과 남은 돈이면 헌금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했다고 자기들이 판단한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스스로 헌금의 가치를 결정했다.

 

이들의 생각과 대척점에는 교회의 필요가 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한 마음으로 자기 소유를 팔아 사도들 앞에 헌금했다.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드린 헌금인 만큼 가치와 지출은 오롯이 하나님께서 맡기는 순종으로 드린 헌금이다. 반면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들의 기준으로 헌금의 가치를 정했다. 얼마를 감춘다는 건 헌금의 가치를 하나님께 맡긴 게 아니라 스스로 결정했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다양한 목적으로 헌금을 드리지만 성경이 말하는 헌금의 본질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데 사용하기 위한 재물로 드리는지는 의문이다. 사람들의 헌금은 다른 목적으로 주를 이룬다. 사람들이 헌금하는 목적을 대변하는 대표로 십일조가 있다. 십일조를 하면 재물을 쌓을 곳이 없다고 하시는 말씀에 의지해서 드리는 십일조의 목적은 단연코 재물이지 하나님의 의와 뜻 때문이 아니다. 십일조라는 마중물을 통해 부자가 되려는 게 본심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도 이랬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이런 마음을 <장사하는 것>이라고 크게 호통치셨다.

 

헌금의 본질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이루는 필요를 위하는 것

 

언뜻 몇 단계를 건너뛴 견해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이 정도면 되겠지?'라고 자기 가진 돈의 가치를 스스로 정했다는 건 헌금이 가져올 반대급부를 계산했기 때문이다. 간혹 사람들이 부자는 되고 싶은데 세전 수익의 십일조를 내야 하는지, 세후 수익의 십일조를 내야 하는지 토론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스스로 부자가 되기 위해 어느 정도 헌금해야 하는지 계산하기 때문에 생기는 토론이다.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람이 가진 헌금에 관한 기저에 깔린 생각을 대변하고 있고, 이들에게 일어난 재앙은 사람이 가진 헌금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 대한 경고인 셈이다.

 

사람이 헌금의 가치를 스스로 정하는 것, 헌금을 드려서 얻을 이익에 상응하는 헌금 수준을 정하는 건 이름만 헌금일 뿐 초대교회의 헌금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헌금이다. 반대급부를 염두에 두고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과 장사하겠다는 속셈이다. 그런데 헌금이라 하니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한 베드로 사도의 책망을 자기 이야기로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된다. 이건 단지 육신의 죽음에 한정된 말씀이 아니다.

 

사람들은 헌금의 반대급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헌금의 반대급부는 꼭 부자가 되는 것처럼 희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가족이 아프지 않으려고, 또 사업이 망하지 않으려고 내는 건 무당에게 복채를 내는 것과 같은 것이지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를 위한 게 아니다. 이건 양심만 있으면 알 수 있는 일인데, 이 마저도 스스로 돌아보지 못한다면 말 그대로 양심에 화인 맞은 거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육신의 문제가 늘 희망적이길 바란다. 그 희망이 헌금을 왜곡하고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 기대하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그런 걸 기도하지 말라고 하면 두려워하거나 싫어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먼저 구할 게 있다는 것이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신 말씀을 잊으면 안 된다. 헌금도 교회의 필요, 곧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는 게 먼저라는 뜻이다. 그리하면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신다.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진 사람이 되면 모든 걸 충족해 주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진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로 거듭난 삶을 산다면 우리의 삶은 모두 하나님 것이 된다. 주인의 의도한 대로 구매한 자동차에 필요한 건 주인이 모두 채우듯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진 사람과 교회에 필요한 것, 그게 돈이든, 건강이든, 사업의 성공이든 필요하신 대로 이루신다. 우리가 그 필요를 규정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걸 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

 

신앙인 개인은 반대급부를 목적으로 헌금을 드리지 않는지 돌아보고, 교회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이루는 필요를 위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일은 단순하게 헌금을 착복하지 말고, 하나님 것을 기쁘게 드리라는 의미로만 좁게 보면 안 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그 그런 결정을 한 이유를 보고, 나는 그렇지 않은지를 반추해 봐야 한다. 아울러 교회의 필요인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돌아보고, 교회는 그 뜻을 간구하고, 그 필요를 위해 헌금이 모이고 지출되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것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서 얻는 올바른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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