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28:11-31)
우여곡절 끝에 바울 사도 일행은 로마에 당도했다. 로마에서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지내는 게 허용되었다. 말 그대로 불구속 재판을 받게 된 셈이다. 바울 사도에게 이런 좋은 기회는 복음을 전하는 좋은 환경이었다. 그는 로마에 있는 유대인 중 높은 사람을 불러 자기가 로마까지 온 과정을 설명했다. 바울 사도가 황제에게 자기 민족 유대인을 송사하려 한다는 소문이 있었는지 이에 대해 부인하기도 한다.
이렇게 모인 유대인들에게 바울 사도는 자기 안에 있는 복음을 전했다. 의외로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은 이 복음에 대해 생소해했다. 유대인들은 나름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모든 곳에서 반대하고 있다는 건 알지만 바울 사도의 사상을 한번 들어보겠다고 한 것이다. 그렇게 바울 사도는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강론할 기회를 얻어 복음을 전했다.
십자가를 진 죄인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복음은 세상 가치를 좇던 사람에게는 언제나 듣지 못한 사상
바울 사도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었다. 바울 사도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소환해 일깨웠다. 이후에도 바울 사도는 로마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제 사도행전을 마쳐가며 바울 사도를 만난 유대인들의 태도에서 사람이 복음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복음은 정말 생소한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전해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셨다. 이 말씀을 알려면 성령이 오셔야 한다는 말씀도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이자 복음이 세상 사람들에게 듣지 못한 사상으로 들리는 이유는 성공과 영광에 대한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가치와 학문과 철학과 사람의 생각 속 영광과 성공은 낮은 곳에 있지 않다. 낮은 마음과 겸손을 말하긴 해도 성공을 위한 수단적 가치는 부여해도 그 자체가 가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십자가를 진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말하지 않으니 듣지 못한 사상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람과 세상은 낮은 자리 자체가 영광이라고 말하지 않아
사도행전을 이야기하는 내내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는 예수를 믿는 것이 구원이고, 그 믿음을 가지게 하는 이가 성령이라는 걸 뼈대로 전했다. 사도행전은 그걸 전하는 성경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충만한 바울 사도 역시 이것을 전했기에 높아지는 가치를 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복은 듣지 못한 사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사상적 지형은 지금도 같은 형국이지만 사람들의 태도는 좀 다르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낮아지는 게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생소해야 당연하다. 하나님께 세상의 성공을 기도하는 사람에게 성경은 생소하고 듣지 못한 사상이어야 정상이지만 그렇지 않다. 기독교나 각종 종교 안에서 도덕적 교훈으로서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한다고 가르치는 관계로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 가르침은 낮아짐이 목적이거나 본성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래야 높아지고 복을 받는다는 목적을 받들고 있다.
무엇보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과 다른 점은 낮아지기를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복음은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낮아지는 게 본성인 사람이 된다는 게 다르다. 노력과 본성이라는 절대적 차이가 있는 것이다. 본성으로 사는 사람은 성공과 평안을 얻겠다는 목적으로 낮아지지 않는다. 본성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게 하고 그게 당연한 것으로 안다. 노력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게 복음과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의 결정적인 차이다.
기독교라는 종교와 복음의 차이는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과 본성으로 사는 차이다.
사람들은 성경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모른다. 신학을 한 사람이나 목사들은 더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성령이 오시면, 즉 거듭나면 본성이 다 알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있다. 몰라서, 더 알기 위해 공부한다는 건 성령이 오시지 않았다는 증거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에도 예수를 믿어 가난을 해결하려 한다. 겉으로는 부자가 되는 게 신앙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세상의 축복은 따라온다는 위선을 시전한다. 자기 어두움을 감추려고 하는 변명이 회칠한 무덤이라는 예수님의 책망을 뒤집어쓰는 꼴이다.
이런 무식과 어두움을 해결하기 위한 신학이라는 학문으로 성경을 보는 공부는 오히려 성령이 오시면 모든 걸 알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볼 때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것만 증명한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정작 어두움과 특히 죄 사함을 받았다면서 기도할 때마다 회개하는 등의 모순에 빠져 있다. 정작 이런 어두움과 모순과 위선이 하나님께서 복음을 주신 목적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복음을 주신 목적이 간절한 위치에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은 진정한 복음을 생경하게 만든다. 어쩌면 자기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복음이 생소하다는 걸 고백하는 게 죄를 고백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태껏 세상에서 성공하고 죽은 다음에는 천국에서 황금 면류관을 쓰기 위해 성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었는데, 그래서 겸손과 성찰이라며 자기를 고소하여 늘 회개하면서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며 살았는데 성경은 그게 아니라는 말을 들으면 생소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고백이 없었기에 바울 사도를 만난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처럼 자기 믿음에 반한다고 배척한다.
안다고 생각하는 복음이 생소하게 느껴질 때 진정한 구원이 시작된다.
하지만 신앙인들에게 그런 담대함은 없다. 행함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다는 성경을 믿으면서 한편으로는 행동으로 지은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형제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자신은 예수님과 달라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연약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런 말들은 신앙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만, 방 안의 코끼리처럼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러다 누가 이런 모순을 파고들면 당황하고 이상하게 여긴다. 순간적으로 자기가 처한 모순을 오히려 변호하고 방어하는 태도를 보인다. 듣지 못한 사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많이 이야기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이 듣지 못한 사상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게 하고, 듣지 못한 사상과의 괴리를 메운다. 예수님께서 믿음과 두려움을 자주 엮어서 말씀하신 이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려움이 건강에 대한 염려 같은 육신의 삶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높아지려는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는 길에 대한 불안과 낯섦에 대한 두려움이다.
생소한 두려움을 이기는 데 필요한 건 바로 <믿음>
예수님께서는 이런 두려움을 가지지 말라고 하시고, 세상을 이겼다고 하셨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낮고 낮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 아들로 드러나셔서 낮아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보이셨다. 세상의 가치로 볼 때 두려운 낮아지는 일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여기시니 세상을 이긴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세상 가치관으로 보면 듣지 못한 사상이다. 생소하게 느껴지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세상의 성공을 간구하는 사람들에겐 생소하지 않다. 생소해야 하는데, 이상하고 믿기 어려워야 하는데 그냥 아무렇지 않은 듯 신앙 생활하는 건 옳은 게 아니다. 어떻게 낮아지는 게 하나님의 영광인지, 십자가를 진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낮고 천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세상에서 높아지기를 간구하는 자신이 생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
사람의 생각에는 낮아지는 게 복음일 리 없다. 그게 믿어진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았을 것이다.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 나사렛에서 와서 죄인과 창녀와 먹고 마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건 정말 생소하고 듣지 못한 일이다. 이런 일을 믿는 건 진짜로 믿음이 필요하다. 세상의 성공이 아니라 낮아지는 본성으로 사는 게 인생의 목적이라는 걸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 믿음이 없으면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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