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은 복음 전도의 역사이자 교회 시작의 역사며 성령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신 성경이다. 유대인이 아닌 다른 민족과 나라가 어떻게 복음을 누리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그 과정에서 사도들과 함께 하신 성령의 능력을 일깨우는 성경이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역시 성령이다. 열거한 사도행전의 기록 목적을 이끌어가는 주체가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을 아는 건 단지 사도행전의 이해나 초대교회 역사를 이해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특히 하나님께서 어떤 신비한 능력을 행하시는지를 이해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사도행전과 성경에 기록된 신비한 기적들을 보며 '하나님께서 이런 기적도 행하시는구나!'라고 감탄한다면 하나님을 바로 믿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능력을 사람에게 자랑하시지 않는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을 믿는다면 기적은 놀랄 일이 되지 않는다.
이제 사도행전을 마치면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건 성령에 대한 이해다. 성령이 어떤 분인지,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떤 변화를 보이는지는 사도행전 초반에 아주 명확하고 상세하게 기록되어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다만 사람들은 이 성경의 흐름과 의도보다는 성령이 행하신 기적 자체에 집중해서 성령의 정체성을 놓치고 있다. 이건 매우 아쉬운 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가장 본질적인 직임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믿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를 믿게 하는 게 성령의 일이라는 게 당연하지 뭐 특별날 게 있는가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 성령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게 한다. 이는 제자들의 변화로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성령의 직임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게 하는 것
변화산에 오르시기 전 "내가 십자가를 질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후 가룟 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성경을 제대로 봤다면 제자들의 걱정은 여러 차례 예수님과 갈등을 빚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게 예수님께서 왕이 되면 누가 좌우에 앉을 것인가를 논쟁한 일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고 왕이 되리라 기대했는데, 정작 왕이 되어야 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진다고 하시니 양극단의 생각이 갈등을 빚은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은 정말 십자가를 지셨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은 어디 두고 힘없이 끌려가 매맞고 십자가에 달리는 예수님을 제자들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배신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나는 저가 누군지 모르겠다"라는 베드로의 말이 이 상황을 잘 설명한다. 베드로는 배신이 아니라 메시아가 어떻게 사람에게 죄를 받아 매를 맞고 있는지를 모르겠다고 한 것이다.
제자들의 갈등과 의심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도 해결되지 않았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엠마오로 도망가기까지 했다. 도마는 못 믿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제자들이 가룟 유다와 달리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건 믿었기에 사도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승천하시면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오순절 성령이 오시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도망가던 제자들이 완전히 달라졌다.
성령이 임하시자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어떻게 십자가를 지는지 알 수 없었던 제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담대히 전하게 되었다.
성령이 오시니 제자들은 이전과 전혀 다르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전하기 시작했고, 이 말을 들은 사람들 역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며 회개했다. 달라진 건 하나뿐이었다. 제자들이 모여서 신학이란 학문을 만들어 공부했거나, 산에 올라 나무를 뽑을 정도로 기도한 게 아니라 단 하나 성령이 오신 그 하나가 달랐다. 성령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완벽히 보여주는 변화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는다는 건 어떤 것인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믿는다는 말 속에는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가 핵심이다. 십자가를 누가 지는지, 그게 어떤 의미인지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런 존재를 사람이 하나님 아들이자 세상을 구할 메시아로 믿을 수 있느냐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죄인, 그것도 사형시켜야 하는 극악한 죄인은 세상에서 더 이상 낮은 신분이 없는 가장 천한 신분을 가진 존재다. 이런 신분의 예수를 세상을 구원할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메시아)로 믿는다는 것이다.
이건 세상에 속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은 높고 강하고 영화롭고 깨끗한 걸 추구한다. 그 갈망의 정점에 어떤 존재가 있어 그가 세상을 구원한다고 믿는다. 사람은 누구나 낮고 약하고, 천하며 추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걸 구원이라 여기며, 자신에게 그런 구원을 베푸는 존재를 메시아 곧 구원자로 믿는다. 따라서 구원자 메시아는 너무나도 당연히 지금의 내 모습보다는 더 강하고 영화로운 존재여야 한다.
그런데 죽은 자를 살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예수가 그것도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는 예수가 능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고 황금 면류관을 쓰는 왕이 되는 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그런 자신을 믿어야 세상에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 세상에서의 성공과 평안한 삶을 간구하는 신앙인은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도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다. 그들의 믿음은 다 거짓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건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성령은 바로 이걸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지 않으니, 성령을 기적으로 행하시는 분으로만 본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니 세상에서 성공하는 걸 하나님의 영광으로 아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성령이 임하지 않은 사람이니 성령을 바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체험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겠는가?
성령을 기적을 행하는 영으로만 안다면 성령을 체험한 적이 없는 것이고, 성령을 체험하지 않았다면 성령으로 거듭나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성령을 바로 이해해야 한다. 성령은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세상 가치관으로는 믿을 수 없는 십자가를 진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게 하시는 영이다. 이 고백은 오직 생명이 바뀌어야만 가능하기에 성경은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성령께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고백하게 하는 생명을 가진 존재로 거듭나게 하신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렇게 거듭난 존재를 성경을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을 기적을 행하는 능력으로만 알면 구원이 없다. 성령으로 거듭나는데 성령이 누구신지 오해하고, 체험한 적 없으니 알지 못하니 성령으로 받는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 사도행전에서는 이런 우리를 위해 성령을 바로 알려 주시고 있다. 높은 곳만 추구하던 우리가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고, 그 그리스도가 우리가 얻어야 할 우리 정체성이라는 걸 믿는 게 구원이다. 성령은 바로 그 일을 하시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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