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못지않은 사도행전의 또 다른 주제는 바로 <교회>다. 사도행전의 흐름으로 본다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으켜 세워 앉은뱅이가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기뻐 뛰었던 일 후에 본격적으로 교회가 어떤 곳인지 말씀하신다. 앉은뱅이를 고친 일로 대제사장의 송사를 받은 베드로와 요한이 갇혔을 때 성도들이 기도했고, 베드로와 요한이 풀려난 일 후에 서로 물건을 통용했다는 말씀으로 교회가 어떤 곳인지 말씀하신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지금으로선 꿈같은 생활을 했다.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모든 것을 나누어 사용하는 삶인데, 이 말씀은 공산주의 이론을 창시한 자들에게 공산 사회주의의 몽상을 가지게 했다는 건 잘 알려진 이야기다. 공산주의자들이 역사적으로 이렇게 심각한 오류를 범한 결정적 원인은 성경의 행간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대로 읽었고 사회에 대한 자기 불만을 해소하는 이론적 명분으로 성경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다른 거 볼 거 없이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만 병행해서 봐도 공산주의 같은 쓰레기 이론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어리석은 공산주의자들만 성경의 껍데기만 본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 금의 순도를 표시할 때나 사용할 법한 수치의 확률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교회 역시 사도행전이 설명하는 교회와는 다른 교회다. 기독교인 대부분은 지금 다니고 있는 교회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와 완전히 다르다는 말에 금방 동의하지 않겠지만,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와 지금의 교회는 형성의 방향성과 정체성이 완전히 반대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정체다.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는가가 핵심인데, 그 모인 사람의 정체에 따라 교회를 형성하는 과정과 법도 완전히 달라진다. 이 차이는 어떤 하나님을 믿고, 어떤 것을 믿는 하나님께 간구하느냐로 명확하게 구분된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기 때문이다.
어떤 하나님을 믿고, 어떤 것을 믿는 하나님께 간구하느냐가 교회의 온전함을 증명한다.
교회는 모두가 동의하듯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므로 핵심은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가 중요하다.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구약성경 속 이스라엘은 늘 여호와 하나님을 불렀지만, 정작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기만 하셨다. 어린아이가 길에서 아빠, 엄마라고 부른다고 상대가 엄마나 아빠가 되는 게 아니듯이 사람이 부른다고 하나님이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정체성에 맞게, 온전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불러야 하나님이 된다. 어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였는가가 교회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사도행전을 통해 설명하는 교회의 성도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다. 여기서 다시 성령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게 하는 성령을 받아 거듭난 사람들의 공동체가 초대교회의 성도들이고, 그런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지금의 교회들이 동경하는 초대교회다. 여기서 핵심은 바로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다. 이건 아주 중요한 핵심이다.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초대교회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라는 건 많은 걸 시사한다. 교회의 성도들은 무엇을 믿고 무엇을 하나님께 간구하는지가 결정되고, 교회는 어떻게 형성되고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지를 결정한다. 이런 결정 사항은 드러나기 때문에 의외로 구별하기 아주 쉽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교회를 보자. 교회에 모인 성도들은 낮고 천한 걸 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낮고 천한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믿는다는 건 나도 그런 사람이 되는 게 구원이라고 믿는 것이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겠다는 건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 혹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길을 따라가서 구원을 얻겠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시면서 심지어 우리에게도 예수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다. 낮고 천한 길로 갈 때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이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겠다는 건 예수님처럼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겠다는 뜻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이런 믿음을 가진 성도들의 공동체인지를 살펴보면 교회의 정체성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너무나 솔직하고 당당하게 높고 위대한 걸 추구한다. 더욱이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높고 위대한 걸 간구한다. 한마디로 예수를 믿어 세상에서 성공하고 평안을 누리겠다는 소망을 이루려 한다. 이는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며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세상의 성공과 평안과 위대함을 소망하는 오늘날 교회는 초대교회와는 다른 교회다.
이런 성도들의 믿음과 정체성은 교회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교회의 정체성을 시작부터 초대교회와 완전히 다르다. 정체성이 다르니 아무리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며 신년 목표를 세워도 되지 않는다. 왜 초대교회 같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지 궁금해하고 아쉬워하지만, 높아지기를 소망하면서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진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게 되는 기적이 일어날 리 만무하다.
많은 사람이 진정으로 바라는 참된 교회, 사도행전에 나오는 것 같은 교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는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거듭난 사람 두세 사람이 만나 교제하면 그게 교회다. 여기에는 기적이 있다. 항상 높은 걸 추구하는 사람이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려는 본성으로 거듭났으니 이게 기적이다. 이 놀라운 일을 위해 필요하면 초자연적 현상도 일어난다.
이 참된 교회는 굳이 목사라는 라이센스나 건물조차 필요하지 않다. 거듭난 사람이 카페에 만나 말씀을 나누면 그게 교회다. 우리 사회는 사람이 만나 교제할 수 있는 공간 인프라가 널리고 널렸다. 그렇게 만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을 나누고 위로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교회다.
이런 만남에서 사람이 동경하는 물건을 통용하고, 서로의 필요에 따라 소유를 팔아 나누었다는 교회가 시작된다. 교회의 필요, 성도의 필요는 높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낮고 천한 십자가로 가서 하나님 아들이 된다는 걸 믿는 기적을 위한 필요다. 이를 위해 필요하면 재화와 용역을 나누는 것이다. 재화와 용역을 나눈다고 교회가 초대교회 모습을 회복하는 게 아니다.
끝으로 앉은뱅이를 고친 일로 베드로와 요한이 갇혔을 때 교회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했다는 것에서 교회의 진정한 모습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교회의 사도가 갇혔으니 당연히 그들의 석방을 간구했겠지만, 사도행전이 전하고자 한 교회의 모습은 그것보다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이라는 것임을 강조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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