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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중풍병자의 치유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3. 4. 25. 17:48 Writer : 김홍덕

사람의 존재 목적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창조하신 이유와 목적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것이다. 사람이 그 자리를 떠나서 죄에 빠졌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두신 창조의 목적이 사람에게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즉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중풍병자이다. 즉, 중풍병자는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몸으로 전달되지 않아 그 생각이 표현되지 않듯,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과 목적이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아서 사람이 그 정체성을 상실하고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영역인 삶의 목적을 정하는 자리로 벗어나 버린 상태가 바로 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중풍이 걸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 표현되지 않는 상황을 설명하는 질병이고, 그것을 치유한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고 표현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므로 죄가 사하여 지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를 떠나 있었던 것에서 돌이켜서 하나님께서 매겨 놓으신 자기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것과 중풍병자가 치유되는 것은 같은 사건인 것이다. 다만 하나는 영적인 사건이고 하나는 그 영적인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육신의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지 못하는 모든 인생은 다 중풍병자이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을 수행하지 않고, 자기의 자리를 떠나 있는 모든 인생은 다 죄인이고, 하나님 앞에서 중풍병자인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가 바로 <죄>인 것이다. 그러므로 중풍병자의 육신이 회복이 되듯이 사람들도 그 삶이 하나님의 뜻이 육신으로 표현되도록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죄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신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더 쉬운 표현이라고 하셨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서 하나님의 뜻이 자기의 삶으로 표현하는 하나님이 주신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영적인 중풍상태에 있는가? 이 병자의 경우를 보면 자신의 병을 고침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하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만나지 못했다. 그곳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많이 있었다. 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막고 있어서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마치 중풍병자의 혈관이 막힌 것과 같이 말이다.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할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 인하여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형식으로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람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 물으시며,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신 존재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행동 양식으로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병자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날 수 없게 막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말씀을 행위 규범으로 받아서 그것을 잘 지켜 행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누구인가?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길에 서서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율법을 그렇게 지키는 자신들을 자랑하는 것이고, 그것은 종교적인 공로와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건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야 즐거워하는 하나님이라면 그건 엘리트들의 하나님일 뿐 만민을 위한 구주는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말씀을 행위 규범으로 받으려 하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고, 그러한 상황이 바로 중풍병자와 같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한 개인의 사건으로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개인에게 있어서 안목이다. 즉 사람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모습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영적인 중풍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에 그 말씀을 행위 규범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그것을 <해야 하는 것>으로 읽는 그 가치관이 바로 자기 안에 바리새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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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중풍병자의 치유 (1)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3. 4. 25. 13:20 Writer : 김홍덕

성경에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병자 중에는 중풍병자들이 있다. 그런데 이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에 대하여는 다른 병을 고치시는 것에 비하여 제법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상세하게 다루고 비중이 있는 사건을 들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마가복음 2장 1절에서 12절에 나오는 사건을 들 수 있겠다. 이 사건은 요한복음을 제외한 공관복음 전부에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한 집에 계실 때에 중풍병자를 치료하고자 네 사람이 병자를 침상에 들고서 왔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이 계신 집에 들어가지 못하므로 그 지붕을 뜯고 위에서 내려서 고침을 받은 사건이다.


이 치유의 사건은 영적으로 중풍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과 더 나아가서 죄가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악한 생각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복음서에 상세하게 기록된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예수님의 치유가 단지 예수께서 육신의 병을 고치시는 분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했다. 물론 성경을 알고 보면 모든 것이 비유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것은 보이는 사건은 표현이고 그 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오신 메시야이시니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육신으로 중풍을 본다면, 뇌 질환이다. 뇌의 혈관에 이상이 생기거나 터져서 뇌의 기능 일부를 수행하지 못함으로 몸의 마비가 발생하는 질병이다. 그것은 사람이 머리로 생각한 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으므로 마비가 되는 것이다. 즉, 사람의 생각이 몸으로 나타나지 않는 상태가 된 것이 바로 중풍인 것이고, 중풍병자라는 것은 머리의 생각을 몸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가버나움의 중풍병자 역시 그 머리의 생각이 몸으로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혼자 걸을 수 없어서 네 사람이 들것에 뉘여서 데리고 온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하신 말씀이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셨다. 아니 중풍병과 죄가 무슨 상관이 있어 그렇게 말씀 하신 것일까? 이 말씀을 읽으며 그 사람이 많은 죄를 지어서 그 벌로 중풍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아주 많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 말씀이 아니다. 


죄의 원어는 하말티아(Hamartia: 헬라어)이다. 이는 ‘과녁을 벗어나다’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그것은 화살이나 창은 과녁에 맞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과녁을 벗어나 버린 상태를 “죄”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자리를 이탈한 상태를 죄라고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즉, 그것은 어떤 행위가 잘했느냐? 잘못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너는 누구이냐?’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은 ‘너에게 주어진 자리와 정체성이 있는데 그 자리에 네가 있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아담이 범죄 하여 숨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라고도 하지 않으시고, “네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 하신 것도 아니라,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신 것이다. 그것도 이미 대화할 수 있게 아담을 찾아 와서 물으신 것이다. 그것은 ‘어디에 숨었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담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인 인간이라는 자리를 벗어나서 뱀에게 꾀여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려 했다는 것, 그것은 사람의 자리를 벗어났다는 것이다. 마치 과녁을 벗어난 화살처럼. 그것이 바로 죄인 것이다.


그리고 어떤 존재에게 그 존재가 있어야 할 자리, 즉 정체성을 정하는 이는 자기 자신이 아니다. 인생은 그 누구도 스스로가 자기의 출생을 정할 수 없고, 심지어 그 부모도 자식을 선택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인간이라도 자신이 세상에 들어온 이유를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부모가 가진 것도 아니다. 부모가 사람의 존재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부모도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라는 존재가 가진 목적을 알아야 한다는 세계 안에서는 자식이나 부모나 다 같은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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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교회는 모르는 빌레몬서

Category : 출간 서적 소개 Date : 2013. 4. 24. 12:31 Writer : 김홍덕

 

빌레몬서 전자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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