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566

빌레몬서 18절에는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으로 회계하라’라고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어떤 손해를 끼치고 도망한 것이라 여겨진다. 이것에 대하여는 공통적으로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재산을 가지고 도망간 것이라고 한다. 즉 오네시모는 주인인 빌레몬의 소유를 가지고 도망을 간 것이다.

 

이것은 사실 죽음을 부르는 짓이다. 우리가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고 설명을 들어도 실감이 나지 않지만, 당시의 기록들이 영화로 해석된 로마시대의 종들에게 있어서 흔히 말하는 인권이라는 것은 개똥만도 못한 것이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주인은 그 종을 아무렇게나 죽일 수도 있고 주인의 유희를 위하여 성적으로도 얼마든지 노리개로 삼을 수 있는 신분이 종이었는데, 그 종이 그냥 도망간 것 만으로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데, 하물며 주인의 소유를 가지고 도망을 갔으니 그것은 자살행위와 같은 것인데 오네시모가 그러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기록을 대하면서, ‘오네시모 참 무모하네’라던가, 아니면 ‘어떻게 그럴 수 있지?’할지 모르지만 알고 보면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 앞에서 오네시모와 같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을 떠나서 자기 좋다고, 또 오네시모 이름의 의미처럼 자기의 유익을 좇아서 다 하나님을 등진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 모습이 바로 오네시모의 모습과 같은 것이기에 모든 인생이 다 하나님 앞에서 오네시모와 같았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오네시모는 종이면서 주인에게서 도망을 간 것이었다. 물론 주인의 집이라는 장소를 떠난 것이기도 하지만 주인의 집을 떠났다는 것은 빌레몬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자기의 이름처럼 유익, 곧 자기를 위하여 떠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인에게서 도망하는 것이다. 오네시모의 그런 모습처럼 사람도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여한 창조목적을 싫다고 하고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좇아서 사는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도망한 것이다.

 

그렇게 오네시모가 빌레몬을 떠난 것은 자기가 생각하는 삶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더 이상 종으로 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설사 그 이유가 조금 다를지라도 적어도 오네시모는 자신의 결정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렇듯 자기가 생각할 때 옳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역시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사건이 바로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다. 선악과는 하나의 열매가 아니다. 사람이 선과 악을 먹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것은 사람 안에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리하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즉 그것은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하여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거나 또한 반대로 그렇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선악과이다. 마치 오네시모가 빌레몬을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러한 것을 볼 때, 물론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어떤 재산을 훔쳐서 달아났겠지만 그것은 다 그 마음 안에 그렇게 하는 것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즉 그 마음 안에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다른 사람을 보고 잘했다 혹은 잘못했다고 판단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듯 오네시모 안에도 그런 마음이 있었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즉 자신의 행동이 실천에 옮길 만큼 선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빌레몬의 소유를 가지고 달아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네시모가 훔친 것은 비록 그것이 물질이었다 해도, 결국은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가졌기 때문인 것이다. 이와 같이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 역시 모든 사람이 그 마음 안에 다른 사람을 보고 또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어떤 것은 선하다고 판단하고 또 어떤 것은 악하다고 판단하는 기준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했는가 하면, 하나님처럼 되려고 그랬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모든 것을 다 만드셨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다 아담에게 주셨지만 단 두 가지 선악과와 생명과는 먹지 못하게 하셨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보고 ‘선한 선생이여!’ 할 때에,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하신 이가 없느니라” 하셨다. 이는 예수님이 선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하다고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재물을 훔쳤다 해도 그것은 그 마음에 선악과로 인함인데, 그것은 우리 모든 사람이 오직 하나님의 영역이요 소유인 선과 악의 기준을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먹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재물을 훔쳐서 종이 아니라 빌레몬과 같이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 도망을 간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만의 영역이요 소유인 선악간에 판단하는 것을 하나님처럼 되기 위하여 훔쳐버렸다는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짧은 생각 - 순종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4. 12. 08:40 Writer : 김홍덕

좋은 것을 누리기에
형편이 충분한데 그러지 않는 것은
불순종의 마음이요,


좋은 것을 누리기에
형편이 되지 않는데 누리려는 것도
불순종의 마음이다.


좋은 날을 누리지 못함은
그렇지 않은 날을 두려워함이니
어떤 순간은 회피하려 함이니
순종하지 못함이고,


좋지 않은 날 과욕 하는 것은
오늘의 형편에 순종하지 않음이니
이 모든 것은 교만함이다.

'김집사의 뜰 > 복음 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우고 버리고 가벼워 진다는 것  (0) 2013.04.18
식탁에서…  (0) 2013.04.15
배추김치  (0) 2013.04.10
하나님의 의, 그리고 공의 (2)  (0) 2013.04.08
하나님의 의, 그리고 공의 (1)  (0) 2013.04.08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종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들이다. 이는 목적에 관하여 말씀하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있다. 그 창조 목적은 하나님을 표현하며 살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듯 누군가를 표현 하는 것, 특히나 그것이 그 본성에 관한 것이라면 그 존재를 우리는 아들이라고 한다. 아들이라는 존재는 물론 물리적으로 남자로 태어난 아이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들이라는 진정한 의미는 아버지 안에 있던 본성이자 유전자가 육신이 된 존재가 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하신 것이다. 즉 이 말씀은 로고스(LOGOS)다. 즉 하나님 안에 있는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가지고 계신 말씀, 곧 그 뜻이 육신으로 나타난 예수님을 아들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즉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육신을 가진 우리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이 예수님과 같이 우리가 가진 육신으로 말씀을 표현하는 존재, 즉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육신 가운데 두셨다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이 가진 육신은 하나님의 품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된 존재로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육신은 우리가 제어하고 단련시켜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가운데 거하는 그 자체로서 이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들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은 다 이 육신으로 사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품성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품성과 말씀을 육신으로 나타내었을 때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종교가 한결 같이 가르치듯이 육신을 제어하여 어떤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이 육신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잘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는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래야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종은 빚을 지고 있는 존재이다. 종이 난데없이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빚을 지고 있으면 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종이라는 말과, 빚이라는 말과 죄라는 말이 다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또한 빚을 졌다는 것은 채권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구매하는 모든 물건들도 그와 같은 빚이 있다. 구매한 주인이 그것을 구매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목적에 대하여 빚을 진 것이다.

 

형광등은 불을 밝히기 위하여 주인이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광등은 주인이 원하는 때에 언제나 빛을 밝히는 목적 아래 빚이 있다. 그와 같이 세상의 모든 만물도 그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다 빚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며 살아야 하는 빚이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적 아래 지음을 받아 하나님을 위한 목적을 가진 모든 존재는 다 종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야 하는 종이기도 하고, 또 그 목적이 바로 아들이 되는 것이기도 하기에 하나님 앞에서 아들이기도 하고, 종이기도 한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하나님께 빚을 진 종이었다가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조성하신 목적을 깨달으면 그 목적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한마디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아들로 살아야 하는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