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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맹인을 고치신 예수 (3)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3. 4. 24. 11:46 Writer : 김홍덕

맹인이란? 빛이 없어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세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을 모르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에 대하여 맹인인 것이며, 하나님의 세계에 대하여 맹인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태초 이전의 상태인 것이다. 그것이 맹인이다. 


그러한 사람이 맹인이기에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본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는 제자 빌립에게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이라고 하셨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그것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봄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가 열린 것이고, 그것은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보는 상태가 된 것을 말씀 하심이 아닌가? 그것이 바로 맹인이 고침을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둡고 하나님 세계의 태초가 열리지 않은 맹인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데,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치유의 완성이요 진정한 치유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교회에 다닌다고 그리고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다짐하는 것으로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믿는 것이라도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안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5:22-23) 

이란 말씀을 하셨다.


이는 마치 우리가 TV에 나오는 대통령도 또 연예인도 운동선수도 알고 그들이 막강한 권력의 대통령인 것과 그들이 연예에 재능이 있는 것과 천부적인 운동 감각으로 운동을 잘하는 선수라는 것을 알고 또 그들의 권력과 재능을 믿지만 그들은 나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 것은 맹신이고 자신의 신념이고 자신의 다짐을 믿는 것일 뿐이다. 그러하기에 그것으로는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부분이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점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모르신다고 하는 그러한 상황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왜 그러한 문제가 발생하느냐 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정체성과는 다르게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결정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만약 오늘 하나님을 믿노라 하며 사는데, 세상을 보니 잘못된 것이 많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많다면, 그것은 불이 꺼진 어두운 방에 들어간 사람과 같은 모양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세계에 대하여 밝음이 있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와 같이 나에게 빛이 비취고 있다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불만이 없을 것이다. 밝은 곳에 갔는데 왜 거기 있는 물건과 부딪히고 다투겠는가? 그럴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그렇듯이 하나님이 만든 세상을 하나님이 주신 빛이 비취고 또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수 있는 빛이 있는데 왜 그렇게 살겠는가 생각해 본다면 오늘 내가 맹인인지? 아닌지? 예수님께서 내 앞에 계신데 정말 치유를 받아 그 분을 보는 사람이 되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명의 맹인들이 예수님과 마주 섰을 때, 내 앞에 예수님께서 계신다는 것을 알고 보기를 간구했다. 그러나 눈을 뜨지 못했다면 그 맹인의 눈 안에, 그 맹인의 인식 세계 안에 예수님의 형상이 들어갈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듯 예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 그 인식 세계 안에 각인이 되듯, 오늘 나에게 예수님이 의미 있게 다가 올 때, 그때 비로소 내가 눈을 뜨게 되는 것이지, 내가 연예인을 알 듯 예수님을 믿는다고 다짐한다고 눈을 뜨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께서 빌라도의 뜰에서 심문 받으실 때부터 시작해서 그 모습을 본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었지만, 정작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 본 사람은 백부장 한 사람 밖에 없었지 않았는가? 그 백부장이야 말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니 어떤 세계가 열렸기 때문에 그러한 고백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백부장이 본 예수님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길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모습이었다. 발가벗겨져서 당시 최고 극형인 십자가형을 받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고 있는 죄인의 모습을 보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라고 했다.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길에 깔던 사람들도 다 배신했고, 3년간 따라다니던 제자들마저 다 떠난 초라한 한 사람의 비참한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보게 되는 새로운 세계가 그 백부장에게 열렸던 것이다. 그 백부장이야 말로 진정으로 맹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세계를 보게 되는 치유가 자신의 것이 된 사람이다. 눈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으니 하나님의 세계를 본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게 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즉, 세상에서 좀 더 위대해져서 사람들 앞에 높임을 받았을 그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 믿노라 하는 사람들이 상을 받게 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하는 수상 소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어찌하랴? 예수님께서 그렇게 높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정하신 분이 아니신데……. 


예수님은 인생이 처할 수 있는 가장 천한 자리인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정하심을 잊지 않고서야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신앙으로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며, 하나님의 빛이 없는 것이며, 빛을 인식하지 못하는 맹인이요, 하나님의 세계가 아직 태초를 만나지 못한 치유 받지 못한 맹인일 뿐인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그것을 신앙이라 가르치는 교회들이 있으니 그런 교회가 바로 이 책에서 말하는 큰 교회인 것이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와 상관이 있어지는 것이다. 한껏 높아져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세상에서 성공할수록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면, 40일 금식한 사람이 더 신앙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면, 사람들의 육신의 병을 기도로 고치는 것이 더 좋은 신앙이 되는 것이라면, 과연 몇 명이나 그 자리에 갈 수 있으며, 몇이나 그런 예수와 상관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에 그래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된다면 그건 만민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가 아니다. 그건 엘리트만의 예수일 뿐이고, 크고 높은 사람들만의 예수일 뿐이다.


하지만 십자가의 자리는 다른 자리이다. 십자가는 세상에서 성공하여야 왕이 될 수 있는 로마의 법과 종교적인 모든 것을 육신으로 지켜내어야만 신앙이 있는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법으로 볼 때 처형할 수밖에 없는 실패자요 죄인이 되는 자리가 바로 십자가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인 것이다. 우리도 세상의 성공과 세상의 윤리 도덕과 또 종교적인 규범을 준수하는 것을 내 신앙의 척도로 혹은 그래야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기준으로 제시 받는다면 다 죄인이고 실패자가 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자리고 그것이 내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내가 상관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과 나의 모습이 같은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알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뜻이며, 그런 고백이 있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두신 목적이 열리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태초가 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빛이 비취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과 의에 대하여 맹인이었던 우리가 치유를 받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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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맹인을 고치신 예수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3. 4. 24. 11:13 Writer : 김홍덕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지 못하다가 알게 된다는 것은 마치 어두운 방안에 들어가서 이것저것에 부딪히고 다치듯 세상에서 곤고한 삶을 살다가 빛이 들어오면 그 방 안에 있는 모든 물건과 화목하게 되어 서로 부딪힘도 없을 뿐 아니라, 방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그 목적에 따라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라”하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방 안에 있는 모든 물건과 부딪히지 않듯 세상의 모든 것과 화목하게 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안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 그것인 것이다.


사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다양한 어려움들 중에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내가 원하지 않는데 어떤 시비에 휘말리고 또 주변의 사람들과 서로 갈등하고 싸우고 힘들어 하는 모든 것은 마치 어두운 방에 들어 간 것과 같이, 또한 빛을 인식할 수 없어서 맹인이 된 사람들의 험난한 삶과 같은 것이다. 그렇듯 우리가 세상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이유는 어쩌면 단 한가지이다. 그것은 <빛>이 없기 때문이다. 


이 빛은 물리적인 빛이 아니라, 개념과 인식에 대한 빛이다. 즉 세상의 섭리와 세상의 존재 목적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일어나는 것이며, 그렇게 우리가 세상에서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면서 곤고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육신의 눈은 보인다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보면 다 맹인과 같은 것이다. 이는 육신의 눈은 물리적인 빛이 있어 형상을 인식하듯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빛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다 맹인이고,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살아갈 때 맹인이 세상을 사는 것과 같이 험난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 내가 존재하는 이유, 왜 사는가 하는 것을 모르는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서 맹인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맹인이 모르는 모든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그 하나를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보실 때 다 맹인이라고 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맹인을 고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왜 만드셨는지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보내시고 그 그리스도의 직임으로서 맹인을 고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신 이유이고, 오늘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관점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 나에게 그렇게 다가 올 때, 비로소 나에게도 예수님께서 맹인을 보게 하신 것이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바쁘게 살다가 한번쯤은 ‘내가 왜 사는가?’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나라를 위해 산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자식들을 위해서 산다고 하지만 그러다가 한 번씩은 그것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고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이 위하여 산다고 하는 나라나 자식들을 위한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다다랐을 때 답을 찾지 못한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 목적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의자를 위한 의자는 없다.”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은 의자는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의자가 동급의 의자들을 위하여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자기의 삶을 자기가 선택해서 삶 속에 들어온 사람이 없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목적이 자기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같은 사람에게, 같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존재하는 것 역시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드는 모든 것, 자동차나 항공기나 컴퓨터나 또는 어떤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만들고 운영한 모든 것은 사람이 만든 물건들을 위하여 만들지 않는다. 자동차 수리용 공구는 자동차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 같아도, 결국은 사람이 자동차를 타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수리를 하는 것이니 그것 역시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자식과 같이 사람을 위하여 산다고 해도, 부모라고 해서 자식을 선택하는 것도 아니니, 그 보다 더 위에 사람을 지으신 이가 계시고, 그 분이 우리의 존재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모르면 사람은 빛이 없는 것이다. 자동차가 그 존재 목적을 상실하면 가망이 없는 것이다. 자동차가 존재 목적을 상실했다면 그것은 운행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 결과는 폐차장 밖에 없는 것이듯, 사람도 그 존재 목적을 상실하면 빛이 없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사망 가운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삶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기에 우왕좌왕 하면서 인생을 고난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목적을 모르는 것이며 그것이 빛이 없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맹인인 것이다.


또한 그렇게 인생의 목적을 모르고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생의 목적을 알게 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인 것이다. 즉, 자신이 창조된 목적을 모르는 맹인인 인생들에게 그 목적을 알게 하여 그것에 눈을 뜨게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인지했다는 것이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지 못하던 인생에게, 마치 컴맹에게 컴퓨터를 알게 하여 주듯이 인생의 목적에 대하여 맹인인 우리를 눈 뜨게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라고 말씀 하셨다. 물론 그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많은 말씀을 통하여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을 말씀 하셨다. 이것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4-5)이라고 하셨다. 즉, 맹인은 빛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맹인이니,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을 인식하지 못하는 모든 인생은 다 맹인인 것이다. 육신의 맹인은 어쩌면 맹인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보게 하는 세상은 무엇이며, 예수님께서 비취시는 빛은 우리에게 무엇을 인지하게 하고 무엇을 알게 하며 무엇을 보게 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의 존재 목적이며, 그것을 설명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으니 그 만드신 목적을 다 가지고 계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그 목적을 아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맹인인 우리가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치유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은 <태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즉 세상이 시작하는 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창 1:2)이라고 빛이 있기 전의 상태를 말씀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맹인의 상태인 것이다. 맹인은 모든 것이 혼돈스럽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공허하며 그 모든 것이 흑암으로 인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가장 먼저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빛이 있으라고 하신 것은 인식이 있으라 하심이다. 그것은 무엇을 인식하고 무엇을 알게 하는 것에 관한 인식이냐 할 때, 바로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며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즉 하나님의 빛이 임하여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 바로 한 개인의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태초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병자를 치유하시는 것으로 설명하면 바로 맹인이 고침을 받는 것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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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맹인을 고치신 예수 (1)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3. 4. 23. 18:20 Writer : 김홍덕

성경에는 많은 맹인들이 나온다. 예수님께서 고치신 맹인들도 많다. 그렇다면 맹인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사람을 맹인이라고 한다. 그런 맹인들, 육신으로 맹인인 사람들을 신비한 능력으로 고쳤다는 사실을 가지고 예수님을 신앙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신 것일까? 


보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빛>을 인지하기 못하기 때문에 맹인인 것이다. 눈꺼풀 아래 위가 붙어 있어서 그렇거나, 아니면 눈은 뜨고 있을지라도 빛을 인지하지 못하면 맹인이 되는 것이다. 육신의 눈이 물리적인 빛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를 육신적으로 맹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빛>이라는 것을 물리적인 의미로만 사용하지 않는다.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어떤 탈출구가 보이면 ‘한줄기 빛이 비쳤다’라고 한다. 또 멀쩡한 대낮이라 할지라도 길을 잘 못 차는 것에 관하여 ‘길눈이 어둡다’라고 한다. 이러한 것은 물리적인 빛의 성질을 인용한 은유적인 표현들이다. 그런 표현들이 물리적인 빛에 대한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물리적은 ‘빛’을 인식하지 못하면 육신의 맹인이듯, 어떤 개념, 어떤 세계에 대하여 잘 모를 때 ‘어둡다’라고 한다. 즉, 어 개념에 대하여 어두운 것 역시 맹인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맹인이 빛을 인식하지 못해서 맹인이듯이, 컴퓨터의 세계에 있어 그 세계의 법과 이치와 개념과 방법을 알지 못해서 컴퓨터를 잘 사용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컴맹>이라고 한다. 그것은 컴퓨터에 대하여 ‘어둡다’는 의미이다. 컴퓨터에 대하여 어둡다는 것은 컴퓨터의 사용법에 대하여 빛이 없다는 것이다. 즉 컴퓨터 세계의 밝음, 사용법이라는 빛과 개념이라는 빛이 없는 상태를 어둡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컴퓨터 세계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은 컴퓨터 세계의 빛이 잘 인지되는 사람인 것이다.


빛이라는 것은 사실 인식이다. 빛이 있으면 모든 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인지되고 실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존재의 목적과 사용법과 외관과 기능에 대한 모든 것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빛이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방에 들어  갔을 때 방 안에 빛이 없다면 그 방에 있는 물건들에게 계속 부딪히는 것은 물론이고,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을 어떤 형태로든지 사용하기 어렵다. 설사 그것이 늘 기거하는 자신의 방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빛이란 것은 인식인 것이다. 


어떤 난관 속에서 빛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난관을 해결해 나갈 방법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고, 컴맹이 컴맹에서 탈출한다는 것은 컴퓨터의 기능과 사용법에 대하여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세계가 열리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즉 컴퓨터를 사용하지 못하던 세계에서 컴퓨터의 세계로 접어드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가 서점에 가서 각종 컴퓨터 프로그램에 대한 사용법을 설명하는 책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표현이다. 


‘MS오피스의 세계로……’와 같은 표현들 말이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가? MS 오피스의 세계가 열린다고 한다는 것은 이제 오피스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고, 그것은 오피스의 운용방법이라는 빛이 비친 것이고, 오피스를 사용하는 세계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만약 오피스의 세계로 입문하지 못했다면, 오피스의 사용법에 대한 빛이 비취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오피스 세계에서의 맹인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맹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맹인이 눈을 뜬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스포츠의 세계에서도 어떤 선수가 실력이 늘기 시작할 때 ‘눈을 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이제 그 종목에 대하여 제대로 아는 선수가 되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공부하는 학생이 어떤 과목에 대하여 흥미를 가지고 개념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눈을 떴다’고 한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 전공에 통계학이 많았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도 통계는 아예 시험 범위에서 빼고 공부했던 나로서는 통계학에 대한 맹인이었다. 그러다 수리 통계학 시간이었다. 통계학에 나오는 어떤 정의 하나에 눈이 열리게 되었는데, 그 이후에 통계학은 그리 어려운 과목이 아니라, 공부하면 되는 과목이 되었고, 지금의 업을 유지하는데도 도움이 되고 있다. 그때 비로소 통계학의 세계가 나에게 열린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셨다는 것은 육신으로 볼 때, 육신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세계를 열어주신 것이고, 그것은 이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에게 빛이 인지 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계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보여주신 기적이요 치유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맹인을 고치신 치유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신 치유는, 컴퓨터에 대하여 알지 못하던 컴맹이 컴퓨터에 대하여 알게 되어 컴퓨터를 활용하는 세계를 보게 되고 알게 되는 세계가 열리듯이, 예수님이 맹인을 치유하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대하여 알지 못하던 사람이 그 세계를 보게 되는 것을 말씀하심이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직임이라는 말씀을 하시고자 치유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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