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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빌레몬서는 시작을 할 때, 바울이 빌레몬에게 “네 집에 있는 교회에…”(2절)이라는 인사를 하고 있다. 이것은 빌레몬의 집 안에 교회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빌레몬이 사는 주택 안에 교회의 모임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납하는 그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는 그 관계성 자체가 교회라는 말씀이다. 바울이 그 교회에 문안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예수님께서 어떠한 교회를 당신이 머리로 거하는 교회로 여기시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로 사회적인 가치, 세상적인 가치에 의미를 두지 않고 성도를 대하여 가는 마음이 연결된 그 관계가 바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이 교회는 오네시모와 같이 하나님의 소유인 선악과를 훔쳐 먹고서 어떤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다가 감옥 같은 세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기만 하면, 다시 말해서 자신이 그러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신분이 어떠하던 지난 날이 어떠하던 빌레몬과 오네시모처럼 한 동동체로 살아가게 되는 진정한 천국과 같은 공동체를 교회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지 않고, 선악과를 먹은 상태 그대로 살면서 ‘적어도 사람이 이렇게 해야지?’하는 기준이나, 아니면 ‘기왕이면 예의 바른 것이 좋지’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상태라면, 예수님과 같이 또 바울과 같이 중보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감옥에 갇힌 사람의 말을 듣고 그 마음을 돌이키지는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볼 때, ‘저게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인가?’ 하면 심판해서 못 박아 버린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바울과 같이 감옥에 갇힌 사람의 말은 악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육신의 연약함과 부정함을 기준으로 육신을 부인하고 오히려 사회적이고 세상적이고 종교적인 것이 잘 갖추어진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생각이 바로 선악과인 것이다.

 

이 빌레몬서는 하나님 앞에서 오네시모와 같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에 이르게 되었는가 하는 것과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께 어떻게 중보하셨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기록하고 또한 빌레몬의 삶을 통하여 어떠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여야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성경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목적 안에 살지 못하는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 종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선악과를훔쳐서 그 마음 안에 이것이 옳다 저것이 그러다는 주장을 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우리는 늘 이 연약한 육신을 부정하면서, 이 육신으로 이룬 업적을 사모하고 돈과 같이 육신의 업적을 나타내는 세상의 재물과 명예와 신분을 사랑하며 살다가, 이 삶이 참 감옥과 같은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낮은 자리로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 십자가에 달리게 한다는 것을 깨달아 돌이키게 되고, 그러한 우리를 하나님께 중보하시는 예수님의 간구하심으로 말미암아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납하듯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납하는 마음과 같이 우리 마음 안에 세상적인 신분이나 세상에서 가치를 부여하는 것으로 사람을 만나거나 대하지 않을 때, 그렇게 만나는 그 관계가 진정한 교회가 되어 또한 이러한 관계가 확장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교회를 이루고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다. 그 교회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곳이고, 하나님은 빌레몬(이름의 의미 : 사랑하는 자)의 이름과 같이 사랑이시니, 이 사랑은 우리가 서로 육신의 연약함을 인정할 때 나오는 하나님의 성품을 말하는 것이고, 그 성품을 자아내는 관계로 엮인 공동체, 조직체가 아닌 공동체를 교회라고 하는 것이며, 우리가 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공동체 안에서 지난날 하나님의 선악과를 훔쳐먹고 달아났던 삶을 다 청산하고, 이제는 사람의 겉 모습에 해당하는 신분이나 재력이나 성격이나 예의와 같은 것에 상관없이 서로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고스란히 그리고 감동적으로 보여준 성경이 바로 이 빌레몬서이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곳은 이러해야 한다. 빌레몬서에 나오는 빌레몬의 집에 있는 교회와, 바울과 빌레몬 오네시모가 가지고 있는 관계로 얽힌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사람의 신분이 어떠하던지 복음을 함께할 수 있고, 그렇다고 복음을 빌미로 자신의 신분이 변하는 것을 꾀하는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 신분과 육신의 어떠함에 대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의를 복음으로 인하여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그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을 빌레몬서에 나오는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 빌레몬서를 하나의 감동적인 편지로 받을 것이 아니라, 빌레몬에게 해를 입힌 오네시모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도망한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또한 바울이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함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 세상의 신분이나 어떤 것을 신앙에 있어 어떠한 기준이나 잣대로 두지도 않고, 또한 그러한 것이 있어야 온전한 신앙이라 말하지도 않는 사람이 되어, 오네시모가 바울 사도로부터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사람(골 4:9)이라는 보증을 받듯,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사람으로 보증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말씀이 빌레몬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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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과 바울은 그 당시의 노예 제도에 대하여 반대하거나 그것을 타파하려 한 사회 운동가나 혁명가는 아니다. 그런 그들이 노예라는 제도에 대하여 의를 두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을 전파하는 수단으로만 여겼기 때문에 그 당시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대우를 오네시모에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오네시모를 대한다고 해서 오네시모의 신분이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에 의미를 두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제도를 용납하지만 그것에 메이지 않음으로 기적과 같은 사랑의 표현이 나오게 된 것이다. 마치 우리가 돈을 활용은 하지만 그것이 내 삶의 성과로 여기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바울과 빌레몬의 마음은 당시 종이라는 신분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는 사건이 된 것이다. 우리의 육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육신은 비록 연약하고 그 안에서 늘 욕망으로 인한 악한 생각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목적 아래 수렴하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게 하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 될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아들이 되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연약하고 악한 것을 서로가 인정할 때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가 강해지려고 하는 자리에서는 사랑이 나올 수 없지 않는가?

 

이렇듯 당시의 제도 안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공동체인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러한 일이 일어나고 그 일을 일으킨 주인공들의 관계가 진정한 공동체인 것이다. 성경은 그 공동체를 교회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이 있게 되어 교회가 되고, 또한 교회는 그러한 것을 확대 재생산하는 하나님의 공동체요 이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육신의 어떠한 조건이나 제도나 규율이나 나이의 많고 적음이나 남녀의 차이와 같이 사람들이 가치를 부여하는 온갖 세상의 것을 넘어서는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대하는 관계가 될 때 그 관계를 비로서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앞에 열거한 것과 또한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세상의 신분과 재물과 같은 그 어느 것도 신앙에 있어 의미가 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일 때 비로서 교회가 되는 것이다.

 

만약에 빌레몬이 ‘종이 어떻게 예수를 믿겠는가?’라고 했다면 복음이 오네시모에게 전해질 수 있었겠는가? 만의 하나 복음을 받았다고 해도 빌레몬이 교회 안에서 ‘그래도 주인과 종이라는 관계는 지켜야지’라고 한다든가 아니면 ‘주인을 잘 공경할수록 신앙이 좋은 것이다’라고 한다면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세대의 많은 교회들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왜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교회에 복귀한는데 현수막을 별도로 걸어야 하는 것인가? 그는 오히려 지난 5년간 교회를 잘 나오지 않은 장로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대통령이었다는 것 때문에 교회에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마음은 빌레몬의 마음과 비교될 수 없는 확실히 다른 마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사회적인 신분에 따라, 혹은 재물의 정도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것이 달라진다면 그것은 그러한 것의 의미를 두는 것이고 그러한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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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빌레몬서에 나오는 내용은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는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 내용이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여 지기에는 체감 온도가 많이 다르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물론 이 말씀을 통하여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중보가 자신의 이야기로 들리기만 한다면 체감 온도와는 무관하게 너무나 은혜로운 말씀으로 느껴지겠지만 말이다.

 

이 시대는 지중해 연안은 로마가 다 점령하고 있었던 시대이고, 그 시대의 종은 주인이 아무 이유 없이 죽여도 큰 일이 아니었고, 주인의 유희를 위하여 종들은 어떤 형태의 성적인 수치도 감당해야 했고, 노예를 사고 팔 때는 남자든 여자든 벌거벗겨진 상태로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하던 시대이다. 그런 시대의 종이 주인의 재물을 훔쳐서 달아났다가 이렇게 사람들에게 노출되었다면 그것은 뭐 재론의 여지 없이 죽은 목숨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다.

 

 

그렇듯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오네시모가 당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바울에게 형제라 칭함을 받고, 또 자기가 배신한 주인인 빌레몬이 다시 자기를 받아 주고, 그러한 과정에서 바울이 죽어도 아무 문제 없는 오네시모를 위하여 빌레몬에게 손해를 갚아 주겠다고 하는 것은 단순한 감동 스토리가 아니다. 이것은 진정한 기적 중의 기적이고 진정한 복음의 능력이며, 우리가 육신 가운데 거하며 살아가는 것이 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가를 너무나 은혜롭게 설명하는 모습인 것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육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지를 볼 수 있다. 이 육신의 삶 안에서 보면 지금 이 오네시모를 대해가는 빌레몬과 바울의 모습은 정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신분의 차이가 없는 지금 세상도 돈 떼어 먹고 달아난 사람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남다르고 분노하는 것이 일상인데, 그 옛날에 종이 돈을 들고 달아났는데 그것을 용서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런데 왜 그것이 기적인가? 지금을 사는 사람들도 오네시모의 일을 보면 체감 온도는 낮아도 적어도 ‘대단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는 것은 왜 그런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굳이 사람이 아니라도 그러한 기적을 일으키시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으신 분이시다. 하나님께는 천하에 둘도 없는 원수라도 상관없다. 그것을 용서하고 말고 하실 분도 아니시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는 그러한 마음이 있으신데, 그것을 표현해줄 존재가 필요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다. 그것은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세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육신이 어떠한 것을 옳다고 여기는 것이 있고, 그것에 메여서 구속 받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금의 모든 사람들은 돈이라는 것 앞에 다 메여 있다. 돈이 악하거나 유익하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미 사회 안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돈에 대하여 구속 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돈에 메이게 된 것은 사람들이 돈에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인 것이다.

 

즉 사람의 가치가 돈에 있지 않은데, 자신의 모든 수고와 성과를 대변하는 대명사가 바로 돈이기 때문에 그 돈이라는 것이 자기의 모은 노력을 표현하고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 세계이다 보니 돈이라는 것 자체의 의미 이상으로 자신의 삶을 그것에 투영시키고 그것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돈에 구속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돈은 또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를 너무 이젠 필수 중의 필수항목이기에 그것을 배척하고는 살 수 없다. 이는 마치 우리가 육신을 벗어나서 살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돈이라는 것이 내 삶의 성과를 대변하는 것이라는 것에 매여서 그것에 집착한다는 것은 삶의 목적이 자신의 삶의 성과 달성에 두고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돈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 자신이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인 것이다.

 

이는 마치 오네시모가 자신의 신분에 대하여 자기가 의미를 부여하고 종이라는 자리를 스스로 떠난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자리에 이른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현상인 것이다. 그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던 명분과 같은 것이고, 오네시모가 빌레몬을 떠난 명분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지으신 이에게 의미 부여를 맡기게 된다면 스스로 삶에 의미를 부여한 사람들과 같이 육신에 거한다는 것은 동일하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돈도 마찬가지다. 돈이라는 것이 사회 안에서 절대적인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나의 삶의 성과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돈은 사회를 살아가는 하나의 도구와 방법으로 알게 되면 돈을 쓰는 용도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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