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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옥에 갇힌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감옥과 같은 이 세상에 그 아들을 보내셨다. 죄를 지은 인생과 동일한 존재인 육신을 입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신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육신에 대하여 선하게 여기셨는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육신을 악하게 여겼다. 그래서 육신을 단련하고 육신 안에서 일어나는 욕망들을 절제해야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은 부정한 것이고 그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고, 그것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여기셨다면 예수님께서는 다른 모습으로 오셨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육신이 하나님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존재라고 여기셨기 때문에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고, 아들을 보내실 때도 이 모습으로 보내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육신을 부인하려 한다.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 즉 그것은 악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 누가 식욕을 금하며, 그 누가 성욕을 누를 수 있단 말인가? 식욕이 일지 않으면 죽을 것이고, 성욕이 일지 않는다면 자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악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악하게 받는 마음이 악할 뿐이다.

 

사람의 모든 마음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사람이 자기 안에서 음탕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을 이기려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런 존재로구나!’라고 깨달으면 된다. 즉 자기의 능력으로는 그것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아무리 종교적인 열심을 가져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러하다는 것을 다 아신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안 그러려고 노력한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드신 분 앞에서 만들 때 주신 것을 감추는 꼴인 것이다. 그 마음이 바로 선악과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가진 가장 심각한 범죄인 선악과는 하나님이 육신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부인하고 자신이 정한 육신의 모습을 가져야만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영역에 대한 도전이다. 하나님의 소유를 훔친 것이라는 것이다. 오네시모와 같이 말이다.

 

사람은 육신의 연약함과 부정함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아담이 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 같이 말이다. 그것은 부끄러워하고 제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 만드셨으니 그런 줄 알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인정하는 것을 바라시며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 이전에 그냥 벗은 상태로 살았던 것이 바로 그것 대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감추려 한다. 알고 보면 너나 나나 다 연약하고 다 부정한 것 투성인데 그것을 감추려 하고 그것을 더 잘 감추면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보니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용납하지도 못하고 사랑하지 못한다. 상대가 강해지려 하는데 사랑할 수는 없는 법이다. 설사 육신의 아들이라도 아비보다 위에 올라가려 하면 용서가 되지 않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반대로 자신이 연약함을 인정하면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다. 아니 알고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살 수 있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만드실 때에 스스로가 연약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사랑하게 되는 마음을 가지시고 만드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나는 음욕을 이기려고 합니다 하면서 나가니,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 되어 악하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가장 큰 죄악인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만든 정체성을 부인하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하는 것이다. 마치 오네시모가 빌레몬과의 주종 관계를 부인한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모든 삶은 죄악 중에 있는 것이 되었고, 서로 사랑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서로 강해지려 하는데 무슨 사랑이 있겠는가? 또한 그렇게 다투다 보니 이 삶이 감옥과 같이 된 것이다.

 

그런 감옥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다. 우리가 부인하는 그 육신을 입으시고 말이다. 오네시모도 그랬다. 아니 바울도 그러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주인을 배반하라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 복음을 전하다 주인을 배반한 사람과 같이 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 모습은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것을 설명하는 모습이다. 즉 오네시모는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우리의 모습이고, 바울은 그것이 아님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과 같은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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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주인의 재물을 훔쳐서 달아난 종 오네시모의 결국은 옥에 갇히는 것뿐 이었다. 이것은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나서 평생을 수고해야 하는 삶이 되고 하와는 출산하는 고통을 얻게 됨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사람의 인생을 한 글자로 표현하면 괴로울 ‘고(苦)’자로 표현할 수 밖에 없다고 하기도 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훔쳐서 달아났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영역인 선과 악을 판단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스스로 힘든 삶이 된 것이다. 실재로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은 스스로가 벗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무화가 나무로 자신을 가렸다고 했다. 선악과를 먹고 나나 자신의 벗은 모습이 잘못되었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도 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먹고 나니 부끄러워졌다는 것이다. 즉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미 그 마음 안에 어떤 것이 선하고 어떤 것이 악하다는 기준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 기준 때문에 벗은 것이 부끄럽게 여겨진 것이다. 부끄럽다는 것은 악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렇듯 모든 사람들의 삶이 감옥에 갇힌 것처럼 곤고하게 된 이유는 스스로가 어떤 것은 선하다고 여기고 또 어떤 것은 악하다고 여기는데, 문제는 그 기준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한 부부가 냉장고를 사러 갔는데 남편은 삼성 제품을 사자고 하고 아내는 엘지 제품을 사자고 하다 싸우고 정작 냉장고는 사지 않고 돌아왔다고 한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남편은 삼성 것이 좋다고, 즉 선하다고 여겼고, 아내는 엘지 것이 선하다고 여겼기 때문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갈등은 그와 같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함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시장에서 싸우는 사람이나 국가간의 전쟁이나 이유는 오직 하나다. ‘너는 잘못되었고 나는 잘한다’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는 악하고, 나는 선하다’라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갈등은 오직 이것 하나 밖에 없다. 이것 때문에 세상이 곤고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훔쳤기 때문이다. 오네시모도 그러했다 주인의 것을 훔쳤기 때문에 옥에 가게 되었다. 모든 인생도 하나님의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인생이 오네시모가 갇힌 감옥과 같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감옥에 간 오네시모는 바울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복음을 받고 자신을 돌이킴으로 바울이 형제라고 칭하게 되었다, .(몬 1:16, 골 4:9) 이것이 무엇으로 투영되어 보이지 않는가? 바로 예수님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즉 빌레몬서에 나오는 바울의 모습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감옥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도 같은 것이다.

 

바울은 원래 그 이름이 ‘큰 자’라는 의미의 사울 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을 대신하여 그것을 전하는 사도가 되면서 그 이름을 ‘작은 자’라는 의미의 바울로 개명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힌 것이다. 바울이 오네시모 같이 도둑질하고 도망 다니다 잡힌 것이 아니다. 그건 날 때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처럼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듯 예수님도 원래 하나님의 본체이신데, 자기를 비어 종의 형상으로 오셨다고 했다.(빌 2장) 바울이 복음으로 인하여 감옥에 갇힌 것처럼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을 하늘로 불러 올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그것도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지고 오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사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시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을 주신 이유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도 육신으로 오신 것이다.

 

흔히들 예수님의 사역을 갇힌 우리를 놓아주신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또 살아가는 삶을 고난이라 하고, 또 한편으로는 갇혀 있다고도 말을 한다. 그런 모든 정황은 다 우리가 갇힌 자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즉 우리의 삶이 옥에 갇혀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에 우리가 속하게 된 것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 마음 안에서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하다고 판단하는 것 때문에 늘 괴롭다.

 

눈에 보이기를 악하게 보이면 그것을 어떻게든지 바로 잡고 싶은 마음에 애쓰고, 또 어떤 것이 선하게 여겨지면 또 그것을 추구하느라 애쓴다. 뭐 그런 것 까지는 좋을지 모르지만,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악하게 보이면 불쾌하고, 선하게 여겨지면 질투하게 된다. 이러한 모든 것은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사람에게는 아주 힘든 문제인 것이다.

 

사람이 그러한 문제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오네시모처럼 하나님의 것을 훔쳤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으니 이 세상에서 선하고 악한 것은 하나님만 정하시면 된다. 마트에서 산 물건은 자기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자리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주인의 마음이다. 전구가 화장실에는 가기 싫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주인의 마음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스스로 옥에 갇힌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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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에서…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4. 15. 14:40 Writer : 김홍덕

나는 잘 하지 않지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식사기도를 한다.

어느새 식사기도는

기독교인의 증표와 같이 되었다.

 

하지만,

한끼 한끼 식사를 대면할 때,

그 감사함은 참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렇게 저렇게 삶의 경륜을 겪다 보니,

이 한 그릇의 식사를 대한다는 자체가

눈물 나게 감사한 일임을 알게 됐다.

 

017

 

사람들이 왜 식사기도를 할까?

예수 믿는 사람이라서 기도하는 것인가?

그래야 천국 갈 것 같아서?

 

내 생각에는

기독교인들의 식사기도 하는 마음보다

탈북자가 식탁을 대하는 마음이

더 감사히 여긴다고 믿는다.

 

식사기도를 해서 기독교인인 것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대할 수 있는 환경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감사함이 있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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